신라 김씨,흉노 김일제,문무왕릉비 역사 재조명

기타|2009. 4. 13. 00:01

 

신라천년이라고 말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신라왕조는 984년(982년?) 56대로 이어진다. 1대 혁거세에서 8대 아달라까지 박(朴)씨왕조, 4대 탈해와 9대 벌휴 12대 첨해 14대 유례에서 16대 흘해까지 석(昔)씨왕조, 그 나머지가 김(金)씨왕조로 구성된다. 잠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 역사서를 인용하여 재미있는 부분을 짚어가면 1대 혁거세거서간, 2대 남해차차웅을 거쳐 3대 유리이사금으로 가는 과정에서 유리와 탈해의 설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왕호에 대해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기를 "남해가 바야흐로 죽으려 할 즈음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너희 박 석 두 성씨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을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기록되어 않아 알 수 없다. 지혜가 많은 자는 잇금이 많다고 하니, 그것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는 탈해의 제안으로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이자국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왕호가 이가 많다하여 『이사금』으로 정해진다. 그 이후 박씨와 석씨가 사이좋게 왕위를 이어가다가 13대 미추때 김씨가 처음으로 왕으로 등장한다. 제13대 미추이사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제14대 유례이사금 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고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가 도우러 와서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고 전한다. 군대가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미추이사금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그의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고 알려져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설화를 추정해보면 아마김알지 이후 미추왕대에 김씨기군사 및 사회세력의 전면으로 나섰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이후 17대 내물이사금(마립간)때 부터 계속적으로 김씨가 권력을 잡고 왕위를 계속 이어온다. 이 번 이야기는 김씨가 권력을 잡게된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라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있는데 과연 김씨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의 시계를 30대 문무왕 대로 올라가서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은데 문무왕릉 비문의 전문을 살펴보자.

 

 

 

 

전문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대충 추려보면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런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내려 온 화관지후(和關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했다. 밑둥과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제천(祭天)할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15대조 성한한(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그 영(靈)이 비로소 금궁전(金宮殿)에 임했다. 이처럼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유산을 보는 것 같았다.'는 부분이다. 문무왕릉 비문에는 이와 같이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투후는 누구이며 성한왕은 누구일까 ?'한서에 의하면 투후는 한나라에 포로로 잡힌 흉노족의 태자 김일제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문무왕과 같은 김씨였다. 그는 한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고 한무제에 의해 투후로 임명되었던 실존 인물로 밝혀졌다.'[참조 : KBS 역사추적] ' 문무왕릉비문은 왜곡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진실을 첮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보자.

 

 

[김일제]가 한국 김씨의 시조든 아니든 간에 2100년 전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의 묘는 현재의 지명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김일제의 묘는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곽거병의 묘에서 보면 동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릉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무릉 관련 책자에는 김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휴도가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

 

 

한나라에서는 7대 임금으로 16살난 무제가 즉위한다(기원전 140년). 무제는 즉위와 함께 흉노정벌을 왕조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제국의 세계쟁패를 위해서 흉노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흉노정벌에 노심초사하던 무제는 이웃 월지국이 흉노에 짓밟혀 하서에서도 서쪽고원으로 옮겨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신하인 장건(張騫)을 파견해 월지와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되레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유배당했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월지왕을 찾아가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편안히 안주하고 있던 월지를 움직일 수 없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러나 장건은 매우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온다. 대원이라는 나라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흉노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대원정벌에 나서서 수많은 천마를 얻게 된다. 천마를 얻고 나서부터 무제의 정벌이 순조로워진다. 드디어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명의 정예군단을 편성해 위청 장군과 합류하면서 하서지방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 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배장되도록 했던 것이다.

 

 

김일제라는 인물은 한무제가 아니면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제는 한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傳)’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물론 철저하게 한인(漢人) 본위로 기록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놀랄 만한 역사의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김일제의 (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閼氏)와 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 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삼황오제의 순임금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진시황제 20대 선조인 목공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휴도왕 ④ 투후(?侯): BC 100년대--김일제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김성(성한왕)-->김알지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김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신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정창씨나 김재섭씨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한번 각인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김일제가 김씨의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하든 말든 고문자학은 중국인 학자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신농과 황제 소호김천 등 삼황오제시대가 실제의 시대라고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참조 : 다음 신문기사모음블로그].

 

'신라의 문화와 풍습은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았다.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금은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황금 숭배는 유목 민족의 특징이다. 또 신라 김씨 무덤과 흉노족 무덤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동일하다.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 역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중국에서 김(金)씨는 흉노계를 상징하는 성씨와 같다. 중국의 김씨는 대부분 투후 김일제를 시조로 모시는 흉노족.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이곳이 김일제의 투국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투국성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가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成), 금성이라고 한다. 조림사업이 시작되면서 숲으로 바뀐 이 일대 지하에 투후국의 흉노족이 ‘금성’이라 부르던 성이 있었다. 김일제의 성을 딴 투후국의 ‘금성’과 신라의 수도 ‘금성’ 두 이름이 일치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

 

'한국에서왕망의 신나라에서 사용되던 ‘화천’이 출토된다. 이것이 발견된 지역은 중국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무역로와 거의 일치한다. 중국왕망의 난에 가담했던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왕망의 피살과 함께 뿔뿔이 흩어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역사서에는 대륙의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북방의 이주민이 한반도 남단 진한 땅으로 이주해왔다는 기록이 여럿 등장한다. 그렇다면 투후 김일제의 자손들도 신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문무왕의 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다. 추사 김정희가 비문의 내용을 집대성한 <해동비고>에 보면 문무왕비문에 기록된 성한왕은 바로 ‘김알지’라는 기록이 나온다. 비문의 성한왕에 대한 묘사는 김알지의 설화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분석된다. 성한왕은 바로 신라 김 씨 시조 김알지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 이주해온 김 씨가 세력을 형성하고 이주민에 불과했던 김 씨들이 최초의 왕인 미추왕을 배출한다. 문무왕에 이르러서는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 패권을 장악한다. '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당전쟁마저 승리한 문무왕. 그의 비문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석탈해가 사라지고 성한왕만이 존재한다. 신라는 이제 김씨 단독 왕국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바로 문무왕릉비문인 셈이다. 신라김씨왕족의 자신감은 신라김씨 시조 성한왕과 더불어 흉노 태자 투후 김일제까지 자신들의 뿌리가 닿음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의 패자로 성장해간 비밀을 담고 있는 고대사의 블랙박스였다.' [참조 : 역사추적]

 

 

기마인물형토기

동북

문무왕릉비하단

화천

 

 

미스터리 여행을 길게 다녀왔다. 한국사가 중국사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띵해오는가? 뭔가 이게 아닌데하는 느낌이 든다면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일단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가지자.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사를 적는 역사학자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거짓으로 적을 수는 있어도 일어난 역사의 원래 진실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위의 사실들이 맞다면 분명 신라왕조 김씨(경주김씨)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한 민족의 역사는 통치자들의 역사는 분명 아니다. 통치자는 사라지지만 민중의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것이다. 그 땅에 붙박고 사는 민중들의 삶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결정해 주는 것이다. 한국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는 분명 한민족의 자산이다. 다만, 한국에 존재했던 김씨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본 것 뿐이다. 중국을 지배한 적이 있던 몽골이나 거란. 여진의 통치가 중국의 역사라고 할 수 없듯이 다녀온 지식여행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씨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 자체는 아닌 것이다.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 한국문자학회 및 여러 역사단체에서는 중국역사의 시작인 삼황오제시대가 또한 고조선시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다시말해, 중국대륙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한민족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논란이 될 부분이어서 많은 역사학자들과 민중들이 좀 더 관심을 보여줘야 할 부분으로자리매김 하는 것으로 혼란스러운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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