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정묘재란,병자호란 그리고 동래성전투

기타|2009. 4. 13. 00:02

 

16세기의 조선의 국내사정은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과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이 즈음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16세기 조선을 둘러싼 이러한 정세는 결국 임진왜관과 졍묘재란 그리고 병자호란을 불러오고 말았다. 16세기 조선에서는 도재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왕은 선조. 조선을 결국 패망의 길로 몰고갔던 당쟁이 처음 시작된 것도 선조 때다. 발단은 공석이 된 이조정랑의 후임으로 누구를 앉힐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조정랑 자리는 그리 노른 지위는 아니었지만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중용한 직책이었다. 후보 물망에 오른 김효원과 그를 반대하는 심의겸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두 사람을 각각 지지하는 파당이 생겨났다. 주로 영남 출신의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기성 세력은 심의겸을 지지했다. 김효원의 집이 동대문 근처이고 심의겸의 집이 서대문 근처였으므로, 김효원 지지파를 동인, 심의겸 지지파를 서인이라 불렀다. 이것이 당파의 시작이다. 당쟁은 사림간의 내분이다. 사림의 뿌리는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길재는 새 왕조 조선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하고 고향 영남에 돌아가 학문과 제자 교육에 힘썼는데, 그 학통을 이어받은 일군의 무리들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은 15세기 말 부터로, 주로 언론 문필기관의 일을 보았다. 사람은 창업공신들인 훈구파를 비판하면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이 양 파간에 벌어진 치열한 대립이 바로 사화이다. 사화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때마다 훈구파가 승리했고 사림파는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정국의 주도권은 결국 사림파에게로 넘어갔다. 그 이유는 사림파가 지역사회에 탄탄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들은 권좌에서 쫓겨나면 자기 소유의 토지가 있는 고향이나 연고지로 내려가 기반을 다졌다. 지역사회에서 사림의 근거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서원이다. 정권을 쥔 사림파는 얼마 안 가 동, 서 양당으로 갈라졌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으며, 그밖에도 청남, 탁남, 대북, 소북, 준론, 완론 등등 수없는 파당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세가 컸던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리켜 사색 당파라 한다. 당쟁의 근본 원인은 관직 수가 한정되어 있는데 관직에 오르려는 자는 많기 때문이었다.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당이든 연고를 맺고 그 지원을 받아야 했다. 당쟁은 학맥, 지역적 연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체로 서경덕의 제자들은 동인,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은 서인,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 조식의 제자들은 북인으로 모여들었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이 정통이 되고 서경덕이나 조식의 학문은 이단시된 것은 당쟁 때문이기도 하다. 이황과 이이의 학문은 남인과 서인의 학문, 즉 승자의 학문이요 조식과 서경덕의 학문은 패자의 학문이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조선이 당파싸움에 말려들 때 일본은1592년 4월 13일 30여만명의 병력으로 드디어 조선을 침입해 온다.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임진왜란 발발전 1591년 8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교토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출병을 선언하고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10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규슈의 서쪽 해안에 나고야성을 건설하여 전쟁을 총지휘할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1592년 1월 6일, 도요토미는 정식으로 동원령을 내려 규슈·시코쿠·혼슈 서부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다이묘들로부터 영지의 규모와 미곡 수확능력에 따라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동원된 일본군의 병력 규모는 총 삼심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일본 육군 9개 군과 수군, 도합 십칠만여 명이 1592년 3월부터 나고야를 떠나 중간 기착지인 쓰시마로 항진하였다. 일본군 선두부대는 심한 풍랑으로 말이암아 도중에 이키섬에서 십여 일을 지체하다가 3월 중순에 쓰시마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다시 일 개월 동안 전열을 정비하며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조선 침략 선봉군 제 1군 18700명을 실은 칠백여 척의 대선단이 쓰시마를 출항, 부산 앞바다에 몰려 들어 옴으로써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선단은 절영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경상도의 해상 관문인 부산진성 부근의 경계상황을 정찰하였다. 당시>일본군의 편제는동래성전루로 유명한 고니시 유기나가의 1군 18,700명을 포함한 9군으로 구성된 육군 152,250명,구기 요시다가의 수군 11,500명,예비군 139,750명등 총 307,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부산진성에서는 수군첨절제사 정발이 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을 거느리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정발은 일본군 선단이 부산 앞바다로 몰려들자, 인근 해안지역의 선박들을 모조리 파괴하여 침몰시킨 다음에, 성안의 군민들과 함께 방어태세를 가다듬었다. 이튿날인 4월 14일, 일본군 제1군의 대장인 고니시는 전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다음, 부산진성에 글을 보내어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정발은 이를 묵살하고 성을 사수할 결의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조총부대가 부산진성 서문 밖 고지에서 성안에 사격을 퍼부어 성벽 위의 조선 군민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틈을 타서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성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고, 부산진성의 수장인 정발은 적탁에 맞아 전사하였다. 남은 군민들도 창칼이 부러지고 화살과 돌이 바닥날 때까지 선전 분투하였으나, 마침내 이날을 넘기지 못하고 부산진성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초전에서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승전의 여세를 휘몰아 인접지역인 서평포와 다대포에 공격을 가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이 때 진주에 있던 경상감사 김수는 부산진성 함락 소식을 듣고, 도내 각 군현의 수령들에게 "밀양에 군사를 집결 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따라서 각 군현의 병력도 모이지 않았다. 4월 15일 아침,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으로 진격하였다. 양산과 울산의 군수도 동래성으로 진군하여 동래부사와 합류하여 방어대책을 강국하였다. 한편, 경상좌수사 박홍은 동래 해안의 경상좌수영에서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언양으로 도주해 버렸다. 부산진성을 점령한 고니시군은 4월 15일에 그 선두부대를 동래성 근처로 이동시켰다. 동래성에는 부사 송상현을 비롯하여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이 군민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송상현은 남문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직접 남문의 수비를 지휘하였다. 당시 동래성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이 동래성 가까이로 접근하자 군사를 모집한다는 핑계로 성에서 빠져 나가 동래성 북쪽에 진을 치고 동래성의 전황을 관망하였다. 일본군은 동래성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서 동래성 남문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는 푯말을 세워 놓고 동래성 군민들에게 항복을 촉구하였다. 그러자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쉽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글을 쓴 판자를 성밖에 던져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군은 동래성에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부대를 3개대로 나누어 동래성에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부대를 3개대로 나누어 동래성 동, 서, 남 세 방면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으면서 까맣게 성벽으로 기어 올라갔다. 동래성의 조선 군민들은 끝내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동북쪽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 곳을 통해 성안으로 몰려든 일본군에게 성을 함락 당하였다.이 혼전의 와중에서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고, 양산군수 조영규 등 군민 대부분도 전사하였으며, 울산군수 이언성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동래부사 순절도에는 그 때의 상황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다.

 

 

 

동래부사 순절도 (동래성 전투를 시간대별로 묘사, 점선안은 해자가 발견된 곳)

 

①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렴다(戰死易 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헌 부사
②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송상헌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⑤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⑥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명
⑦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와 2009년 현재 동래부 모형 비교 사진 (제공 :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2005년 6월 부산의 지하철 3호선 수안동역 공사 현장에서 수많은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아래턱이 창으로 잘려나간 성인 남성의 유골부터 뒤에서 조총으로 관통당한 어린아이의 두개골까지 그 상태도 천차만별이었다. 이곳은 과거 동래성이 있던 자리. 유골뿐만 아니라 수많은 화살촉과 칼. 창날, 그리고 동래성 해자에 설치된 나무 막대기들도 물길에 휩쓸린 채로 발견됐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차에 이뤄진 발굴에 따라 최하 81개체에서 최대114개체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화살촉과 칼. 창날, 깍지, 찰갑, 투모들과 목익이 발견된다. 해자에 설치되는 나무 막대기인 목익이 수천 개가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래읍성의 해자는 놀랍게도 목익과 함께 도심의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해자가 유골들의 떼무덤이 되고만 것이다.임진왜란 당시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동래성 안에도 연일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최대 5천여명의 조선인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래성 전투 후 왜군들은 수많은 조선인들의 시신과 일상용품까지 모조리 다 해자에 버렸다. 그리고 400여년이 지나 발견되기까지 이 해자는 가엾은 유골들의 무덤이 되어 왔다.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은 14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남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온 고을 사람 한꺼번에 성 안에서 피로 물들고...모두 죽어서 곡할 자 없는 이 그 얼마인지 모른답니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의 詩 동래맹하유감 中> 1597년 정유재란 이후에도 일본의 조선 학살은 계속되었다. 전사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아 있는 조선인의 코를 베기도 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반항하거나 피하는 조선인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인 말살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던 임진왜란. 세상에 나온 동래성 유골들이 『조선판 킬링필드』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동래성 해자에서 나온 유골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7년간의기록중 중요한 사건만 간략히 살펴보면 1592년 4월 13일(임진왜란 발발), 4월 14일(부산진 함락) ,4월 15일(동래성 함락), 4월 28일(8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던 이일 신립 충주에서 대패, 신립 자결) ,4월 30일(선조 몽진), 5월2일(일본군 한성 점령), 5월 7일(이순신, 옥포에서 일본함대 격파), 5월 29일(사천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5월(선조, 이덕형을 명으로 보내 구원요청,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화재), 6월 13일(일본군, 평양 점령), 6월(선조, 의주에 피난, 명의 지원군 도착), 7월 8일(한산도 대첩. - 일본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저해권 장악), 7월말(곽재우가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7월(묘향산의 휴정 사명대사가 전국의 승병을 일으킴), 7월(회령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일본군에게 잡힘), 8월(금산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전사), 8월(명나라 대표 심유경이 종전을 위한 회담시작), 9월(이순신, 부산포에서 일본수군 대파), 10월(제1차 진주대첩), 12월(이여송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옴), 1593년 1월(의병, 관군, 명군이 연합하여 평양성 탈환), 2월(행주대첩, 함경, 평안도의 왜군 한성으로 퇴각), 3월(심유경 일본과의 강화회담 재개), 6월(제2차 진주성싸움), 8월(일본군 철수 시작, 명군 철군), 10월(한성으로 선조 돌아옴), 1593년 1월(도요토미 히데요시 명과의 화의조건에 반발하여 정유재란 발발), 2월(이순신 무고로 투옥), 7월(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하고 원균사망, 이순신 재임용), 9월(명량해전), 10월(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이다. 정유재란은 1597년(선조 30년) 재발하여 1598년 9월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철군을 시작하여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대파 당하고 이순신 전사로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 기간 중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는 약 105회로 집계된다. 이 중 조선군이 공격전을 벌인 게 68회, 방어전을 벌인게 37회로 조선군이 훨씬 공격적 이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선군의 승리가 65회, 패배가 40회로 조선군의 우세로 나타나고 있다. 명군 참전은 105회의 전투 중 8회에 그쳤다.

 

임진년 이후 7년에 걸친 전쟁이 조선, 명, 일본 세나라에 준 영향은 대단히 커서 삼국이 다 황폐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조선은 특히 심했는데 왜적의 침공을 받은 이외에 명나라 군사의 주둔으로 인해 정신적·물질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전쟁 중 국내 인구의 소모는 물론, 국보적 문화재 - 특히 건축물, 서적, 기타 미술품의 약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흔히 전쟁이 따르는 기근과 질병 그리고 도적떼들은 전란 후에도 계속 되었다. 또한 어의였던 >허준이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 25권을 비롯하여 많은 의서를 편찬했던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전쟁후, 조선인의 애국심과 자아반성 그리고 모든 방면의 개선은 물론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라든가 명나라에 대한 숭앙심은 더욱 높아갔다. 즉 명나라는 우리 조선이 위급할 때 도와준 은공이 있다 하여, 지식층의 사대주의적인 존명사상은 날로 높아갔다. 이러한 사상은 후일 명나라가 망하고 청이 일어나 청과 관계를 맺은 후에도 계속 되었다. 전쟁 중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왜군에게 잡혀 갔던 남녀들도 많았지만, 왜인으로 아군측에 포로된 자들이 적지않았다. 이들의 처리 문제에 관하여 조정에서 상당한 논의가 거듭되다가 결국 귀순자에 대하여 그의 재주와 원함에 따라 적당한 자리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의 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아들을 죽이고 그 뒤를 이어 국내를 정돈할 때, 먼저 조선과 화친을 맺으려 하여 쓰시마주를 통하여 여러번 교섭을 해 왔으나, 우리 조정에서는 응하지 않다가 선조 39년에 이르러 이를 허락하였다.이때 전후하여 일본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의 귀환도 많이 있었지만, 귀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 산 자도 많았다. 귀환하거나 않거나를 막론하고 이들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전파된 문물과 기술이 적지 않았는데, 도자기 제조의 기술과 같은 것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또 전쟁통에 왜군들이 직접 약탈해 가지고 간 것도 많았는데 각종 도서와 보물과 기타 활자 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요업이 발달하고 조선 서적의 재발간과 활자의 사용이 시작되어 일본 문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와의 수교는 선조 39년부터 시작되어 그 후 2백 여년간 사절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으며, 쓰시마와'의 통상 무역도 광해군 초부터 시작되어 부산에 왜인과 통상을 위해 설치했던 관산인 왜관이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담배'와 '고추'는 이즈음 일본과 교역이 시작되면서 들어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 선조는 당쟁과 난리 속에서 그의 밝은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차츰 나라의 질서가 다시 바로잡혀 갈 무렵 춘추 57세로, 재위 41년만에 승하하였다.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만주 지역에서는 만주족(여진족)의 세력이 커져갔다. 만주족은 나라를 만들어 후금이라 이름하고, 명을 공격하였다.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을 이유로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중립외교를 하였고, 이에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 붕당에 의해 인조가 왕이 되면서, 조선은 노골적으로 후금을 멀리하고, 명을 가까이 하였다. 이에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하였다. 청군의 공격을 받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 또한 청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된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항복해버렸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생산량에 큰 손실을 보았던 조선은 그 피해가 제대로 복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시 병자호란을 당했다. 병자호란 후 조공이 늘어나면서 조선의 민중들은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권력 유지를 위해 북벌론(힘을 길러 청을 정벌해야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민중들을 더욱 다그치기 만할 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많은 것들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두 전쟁의 피해 복구를 위해서 나타난 새로운 것들로, 이러한 새로운 것들과 달라진 모습 때문에 병자호란후조선은후기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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