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사망을 애도하며 보는 유명 가수들의 사고 사망사

샐각의창|2009. 7. 5. 16:25

 

또 한명의 음악계의 별인 '마이클잭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생활을 할 까 궁급해진다. 많은 유명 음악인들이 각종사고로 죽었다. 아래에 나열할 유명인들 외에도 드라우닝풀의 보컬 '데이브 윌리암스' 도 약물복용으로 사망, TLC의 랩퍼 '레프트아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일반인 들이야 이런 사망 사고가 얼마나 많겠는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계기로 회고해 보는 이유는 유독 유명연예인들의 죽음에는 약물이나 자살등의 사유가 많아서이다. 그들은 고통의 임시 치유수단으로 약물복용등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고 결국은 죽음으로 간 듯하다. 철학이 상실된 시대이긴 하지만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쇄신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항상 고통의 늪 속에서 허덕거림을 본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로에 따르면 절망이란 인간의 실존을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란 정신이고, 정신은 여러 계기들의 종합이다. 이 계기에 관계할 수 있는 즉 반성의 능력을 갖춘 존재가 비로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교적 실존에 도달하지 못한 인간은 이 계기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있든가, 자기 자신이 되고 싶든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든가'의 세 가지 종류의 절망이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러나´가장 불행한 사람의 무덤은 비어있기 때문´에 절망에서 벗어나기를 권유한다. 물론 키에르케고로는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받기를 권장한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결론적인 부분은 동감할 수 는 없지만 그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 곧 절망이라는 점에서는 인식을 공유한다.나는 절망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실존도, 구원도 해탈도 없을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 인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절망의 계기를 가다듬은 뒤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게 한 원래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한 신앙의 정의이다. 절망을 벗어나는 방법을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구할 것인지 불교적 깨우침으로 구할지 아니면 노장의 사상에서 구할지 아님 또 다른 방법으로 구할지는 각자에게 달려 있겠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터널이 시작되면 끝이 있는 법>이다.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 묻고 해답을 구해볼 필요가 있다.

 

 

 

 

★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 1935.1.8~1977.8.16)

 

 

앨런 프리드에 의해 명명(命名)된 20세기의 혁명적 음악 로큰롤(Rock & roll)을 미국을 넘어 전세계에 전파한다. 잘 생긴 얼굴, 관능적인 춤, 흑인의 R&B 창법으로 무장한 최초의 백인‘로큰롤스타'였다. 성(性)적 암시와 기성세대에 대한 냉소가 복합된 강한 반항적 정서를 표현했던 그는 빌보드 차트에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119곡을 랭크했다. 음악적 재능을 감지한 그의 어머니에 의해 그의 열두번째 생일에 기타를 선물 받고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그의 명성은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소련에서까지 그의 음반이 불법으로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정도이다. 하지만, 성공이 가져다준 거대한 부와 명성  인기인으로서의 고독감 그리고 인기유지에 대한 강박 관념은 향락에 몰두하게 된다. 탐식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스크림 다섯 개,땅콩버터와 젤리를 먹고도 베이컨 한 파운드로 만든 샌드위치를 사먹기 위해 자가용 비행기를 동원할 정도 였다 한다. 비만증 치료제를 위시해, 불면을 해결하기 위해 수면제를, 다시 잠에서 깨기 위해 각성제를, 그리고 습관적으로 마약을 복용하고 말이다. 한 때 8개월 동안 9,000개의 알약을 복용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약물에 절은 삶을 살았다.수많은 여인들과 끊임없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으며 결혼 후에도 늘 나이 어린 여자들을 침실로 불러 들인다.1977년 8월 16일 자신의 저택 화장실에서 '금색 잠옷’을 걸친 채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42세의 짧은 생(다른 불운의 음악인에 비하면 길지만)을 마감한다. 그가 사망하던 날 그가 읽던 책은 점성술과 성체위에 관한 사진책이었다고 당시의 검시관이 전하고 있다. 그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했지만 그의 내면은 정신적 빈곤과 황폐함으로 병들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질이 없으면 정신마저 황폐해 지는 것은 주위에서 많이 본다. 그러나, 물질적 성공이 정신세계 마저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다는 것도 다시 일깨워준다.

 

 

☞ 관련사이트 : 엘비스프레슬리 홈페이지, 러브미텐더

 

 

★ 지미 핸드릭스 (James Marshall Hendrix / 1942.11.27 ~ 1970.9.18)

 

 

1970 예측 못한 죽음을 몇 달 앞두고 밴드 오브 집시즈 결성하였고 언론에서의 평은 '때론 강렬하고 때론 흐느끼는 수소폭탄'이라 불렸다. 본인은 “영혼을 때려 영혼을 여는 종교음악”이라 자평하였다 . 영국 BBC가 뽑은‘20세기 기타리스트’1위이며 현대 록 밴드 기타연주의 교본이자 바이블이다. 키스를 거쳐 비니 빈센트 인베이젼을 거쳤던 흑인 기타리스트인 '비니 빈센트'나 그래미 어워드의 단골손님인 '레니 크라비츠'를 제 2의 지미 헨드릭스로 이름 붙일 만큼 큰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일생을 보면 7세에 부모 이혼,어머니는 알코올의존증으로 사망,학교에선 문제아,군대에선 고문관이었다. 그에게 음악은 슬픔에서 몸부림치다 만난 해방구였다. 1960년대 미국 록 문화, 히피정신의 중심이었으며 획일주의에 반대하고 사랑과 평화를 갈구했다. 하지만, 대다수 일찍 요절한 뮤지션처럼 술과 섹스, 무엇보다 마약에 탐닉한다.마약은 당시 뮤지션들의 화두였다. 비틀스의‘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마약의 일종인 LSD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미핸드릭스,짐 모리슨,재니스 조플린. 그들은 그 시대의 최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셋 다 마약쟁이 였다.1970년 9월 18일 영국 런던에서 지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었다.1970년 10월 4일 재니스조플린은 할리우드 호텔방에서 숨졌다.1971년 7월 3일 짐 모리슨 역시 사망했다. 세 명 모두 만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 이었다.

 

 

☞ 관련사이트 : 지미핸드릭스 홈페이지, 지미핸드릭스 대표곡 Voodoo Chile

 

 

★ 랜디 로즈 (Randy Rhoads / 1956.12.6~1982.3.19)

 

 

기타의 1세대는 '지미핸드릭스' 로 말한다. 2세대가 '제프백' '지미페이지' '에릭크랩톤'이고 3세대가 '잉위망스틴' '게리무어' '에디워드 반헤일런'이다. '랜디로즈'는 2세대와 3세대 사이로 흔히들 말한다.지미핸드릭스가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반면 랜디로즈는 클래식 기반이다. 그가 처음 기타를 연주한것이 6살 때 였는데 할아버지에게서 gibson기타를 선물 받으면서 였다 한다. 그의 Play에 클래식적인 음감이 살아 있는건 그의 어머니의 Classic교육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1979년 오지오스본의 오디션에 응해 오지오스본에 가입한다. 잘 나가던 랜디로즈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은   82년 3월 19일 새벽 이었다, 1982년 랜디로즈를 포함안 오지오스본밴드는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등으로 이어지는 순회공연을 계속했는데 운명을 갈라놓는 플로리다에 도착한 것은 3월 18일이었다. 레이크랜드에서의 콘서트가 끝나고 이들이 다음 공연장소인 오랜드로 가는 도중 버스가 리스버그에 잠시 들렀는데 버스 운전사인 앤디 에이콕이 세스나비행기의 조종면허를 가지고 있으니 한번 타보자는 제의를 했다. 앤디 에이콕의 제안으로 우선 흑인 의상담당인 레이첼, 그리고 랜디가 비행기에 타기로 하였다. 세스나기는 하늘을 선회하는 도중에 밑에 있는  투어버스 위를 저공 비행하게 되었는데 3번째 비행을 할 때 세스나기의 날개가 버스 뒷부분에 부딪쳐서 균형을 잃고 그대로 옆에 있는 집 창고에 충돌하여 3명은 즉사하고 말았다. 28세 때 였다. 조지오스본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불을 껐을 때 세스나기는 무자비하게 부서져 있었고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기내에는 손과 발이 여기저기 굴러있어 마치 지옥을 방불케 했다." 오지오스본 "랜디 로즈는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타리스트였다.그는 여지껏 내가 만난 최고의 뮤지션이다"이라고 한 대목에서 못피운 정열이 너무나 안타깝다.

 

 

☞ 관련사이트 : 랜디로즈 추모 홈페이지, 랜디로즈 대표곡 Mr Crowley

 

 

★ 존레논(John Lennon / 1940.10.9 ~ 1988.12.8)

 

 

1962년 10월 5일 비틀즈 데뷔음반‘Love Me Do'를 발매하고 1970년 4월 10일 비틀즈 해체후 솔로로 데뷔한 그는 유명한 ‘Imagine' 발표 이후 가정을 위하여 칩거에 들어가 있던 그는 아들을 위하여 재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존 레논과 그의 아내 요코 오노는 1980년 8월 22일 뉴욕 레코딩 스튜디오에 도착하여 활동을 벌이던 중 1980년 12월 8일 마크채프먼에게 저격당한후 사망한다. 저격 당일 12월 8일에 라디오 인터뷰 에서 한 말은 이렇다. "나는 전보다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고 싶은데, 그 친구는 바로 나의 부인이며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벌써 일에 질려버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될 날까지 나는 일을 하게 될 입니다." 그날 자기가 죽을거라는 생각이나 했겠는가. 인터뷰를 마치고 요코와 함께 나온 존은 한 사내가 사인을 청하자 친절하게 사인을 해준 뒤 자신의 다코타 아파트에 도착한 존은 누군가 외치는 것을 듣는다. "Mr.Lennon" 뒤돌아 본 존에겐 지척에 아까 사인을 해 준 사내(마크채프먼)가 서 있었다.이내 총성이 들리고 존은 쓰러진다. 마크채프먼은 존레논의 광팬 이었고 정신병자였다. 병원으로 실려가던 그가 남긴 말은 한 마디.구급요원이 물었던 "당신이 존레논입니까"에 대한 "Yes..."였다. "Yes"는 그의 아내 오노요코가 존레논이 힘들때 마다 힘을 실어주던 단어였다. 나이 49세 때 였다. 재능있는 한 명의 별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 관련사이트 : 존레논 추모 홈페이지, 존레논 대표곡 imagine

 

 

★ 프레디머큐리(Freddie Mercury / 1946.9.5 ~ 1991.11.24)

 

 

퀸(Queen)의 보컬이다. 퀸(Queen)은 그 음악성으로는 비틀즈를 능가하는 그룹이나 영국그룹이라는 이유로 미국내에서는 의식적인 경계를 받게 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음악을 아직까지 흉내내는 그룹이 없다는 자체를 화두로 남긴다.  그 이면에 프레디머큐리가 위치하고 있다. 70년대에는 선천적인 미성을 가진 음악 [Nevermore,Bohemian rhapsody,Love of my life,Good old fashioned lover boy]을 80년대에는 힘있는 음악 [I was born to love you,Too much love will kill you,The show must go on]을 구가했다.그는 1991년 11월 24일 에이즈로 영국시간으로 오후 7시 사망한다.그가 에이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사망하기 겨우 하루 전에 밝혔다.얼마만큼 오랬동안 에이즈 바이러스에 시달렸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프레디는 묻히지 않고 화장되었기 때문에 방문할 묘지는 없다. 45세의 프레디는 이런 음악이 연걸될까 하는 의문을 남겼다. 지미 핸드릭스, 존 레논, 모트 더 후플,더 잭슨즈, 마를린 먼로, 오페라,발레, 샴페인, 인디안 음식 등을 좋아했던 천재적 보컬리스트 프레디는 그렇게 떠나갔다.

 

 

☞ 관련사이트 :퀸 홈페이지, 보헤미안 랩소디

 

 

★ 커트 코베인(Kurt Donald Cobain / 1967.2.20 ~ 1994.4.5)

 

 

너바나(Nirvana) 의 기타 및 보컬리스트이다. 1989년 1집 앨범 [Bleach]응 내었고 1993년 MTV 비디오상 최우수 얼터너티브 비디오부문으로 수상한다. 그의 어린 시절도 순탄치 못했다. 8세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부모와 친척들이 돌아가며 돌보게 되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면서 마약중독자들과 어울려다니게 되고 고등학교 자퇴까지 이어진다. 그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인 음악 하나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게된다. 먹고 살던 문제에 직면했던 커트코베인은 1988년 606달러 17센트로 첫앨범인 <Bleach>를 만들고 발표한다. 1991년 <Nervermind>는 첫 프레스인 4만8천매가 몇일안에 다팔리 등 너바나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솟구친다. 최종적으론 마이클잭슨이나 건즈,U2의 매상고를 앞질렀다. <smells like teen spirit> 은 디렉터의 강력한 푸시로 인해 MTV에서 콘스탄트로 이어져 너바나의 성공은 확실해지고 겉만 번지르르한 기성세대의 음악이 판치던 시점에 무너진가정과 낡아빠진 가디건을 입은 노동자계급의 너바나는 서양세계의 전체의 10대 20대 젊은이의 대변인이 되어버렸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예전에 생계 유지를 위해 음악을 해야했었던 커트에겐 갑작스런 크나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찾아오는 팬들에게 싫증이난 커트는 그 팬들을 자기가 만들어낸것 이라는 점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고 명성과 성공에서 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또 마약중독에 빠지게 된다. 언론에서 윤리,도덕, 상식이 없는 아주 저질의 마약 중독자들로 묘사되고 아내 커트니러브는 남편을 깔고뭉개는 미친 여자로 표현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는 과정에서 1994년 3월4일 로마에서 커트가 갑자기 의식불명으로 쓰러지고 위에서 50개나되는 로이프놀이 발견되며 커트는 이후 너바나, 커트니러브 와의 관계가 위기에 다다란다.  자기가 만족하지 못하는 음악 연주에 대해 죄악감이 쌓였고, 원인을 알수없는 복통과 마약중독으로 인해 하루 빨리 이세상을 하직하고 싶다고 생각한 듯 하다. 로마 이전에도 연속된 자살선언과 시도는 실패하였지만 1994년 4월 5일  바륨과 헤로인을 복용하고 커트니러브와 팬에게 긴 편지를 쓰고나서 총을 자기 머리에 대고 당긴다. 그의 나이 28세. 유언의 마지막은 "l Love You. I Love You"였다.

 

 

☞ 관련사이트 : 너바나 팬클럽, smells like teen spirit

 

 

★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 1943.2.25~2001.11.29)

 

 

조지해리슨은 비틀즈의 멤버였다. 전체 삶이 뒤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폐으로 사망하였고 독특한 행적을 보여주어 글로 남긴다. 레넌과 매카트니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하였으나 음악적으로는 두 사람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1970년 비틀스가 해산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60년대 후반 인도를 여행한 뒤에는 신비주의에 심취해 힌두교도로 개종하고, 비틀스의 음악세계에 인도의 명상 세계를 접목하는 한편, 비틀스가 해산한 뒤에는 밥 딜런(Bob Dylan),에릭 클랩턴(Eric Clapton) 등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여러 번에 걸쳐 방글라데시 기아돕기 자선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솔로로 활동하면서 <My Sweet Lord><What Is Life>등을 발표하였고 1988년에는 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Traveling Wilburys)의 기타리스트가 되는 등, 2001년 11월 58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죽기 직전까지도 음악 활동을 쉬지 않았다. 비틀스 멤버 가운데 가장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로  '조용한 비틀(Quiet Beatle)'로 불렸고, 사망 이후 유해는 인도의 갠지스강(江)에 뿌려졌다.

 

 

☞ 관련사이트 : 조지해리슨 홈페이지, Here comes the Sun

 

 

★ 모리스 깁(Maurice Ernest Gibb / 1949.12.22 ~ 2003.1.12)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 writer)이다. 형제 로빈(Robin Gibb), 배리(Barry Gibb)와 함께 그룹 비지스(The Bee Gees)를 결성해서 세계적인 팝 그룹으로 성장했다. 1958년 호주에서 그룹 깁스(Gibbs)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비지스로 이름을 바꾼 후, 1967년 영국으로 돌아와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미국으로 진출한 비지스는 1977년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 OST 에도 참여했고, 1997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 그룹 비지스에서 모리스 깁은 기타와 키보드를 담당했고, 2003년 장염 합병증으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8년 남은 두 형제는 모리스 깁 사망 5주기를 맞아 다시 그룹을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사고사망사는 아니지만 그들의 음악이 평이하고 즐기기에 부담이 없었던 기억에 역시 글을 남긴다.

 

 

☞ 관련사이트 : 비지스 홈페이지, stayin' alive

 

 

★ 알리야(Aaliyah Dana Haughton / 1979.1.16 ~ 2001.8.25)

 

 

1998년 의류브랜드 타미힐피거의 전속 모델이었으며 <로미오 머스트 다이> <Queen Of The Dammed>의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미국내 뿐만 아니라 세셰적인 거물급 스타로 떠오르던 그녀는 2001년 8월 바하마에서 공연을 하러가던중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나이 22세 또 한명의 인재가 불운의 사고로 간 것이다.

 

 

☞ 관련사이트 : 알리야 홈페이지, The One I Gave My Heart To

 

 

★ 레인 스탈리(Layne Staley  / 1967,8,22 ~ 2002.4.5)

 

 

흔히들 너바나(Nirvana), 펄 잼(Pearl Jam),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사운드가든(Soundgarden)를 시애틀의 4인방이라고 부른다. 얼터너티브‘그런지 빅 4’의 노래들은 한결같이 우울하고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각 밴드들마다 구별되는 개성을 갖고 있다. 너바나가 펑크에 가깝다면, 펄 잼은 하드록과 더 친하고, 앨리스 인 체인스는 어두운 고딕 메탈적이며, 사운드가든은 정통 헤비메탈에 사이키델릭을 칵테일화한 음악을 추구했다. 앨리스의 음악은 기타 연주에 마이너 코드를 사용함으로써 어두운 분위기를 창조한다. 그래서 이들의 노랫말에는 죽음, 절망, 약물, 외로움같은 주제들이 자주 등장한다. 패배주의가 1990년대 X세대의 시대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음악이 인기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기나 유행이 아니라 동질성의 공유였다. 2002년 4월, 음악만큼 허무한 질감의 목소리를 소유한 레인 스탈리는 시애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35세의 나이로 자살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8년 전 '너바나'의 커트코베인 과 '앨리스 인 체인스'의 레인스탈리가 사망한 날짜가 동일하다. 아마도 그는 자살하는 시기를 커트 코베인이 사망한 날짜를 맞춤으로써 뭔가 전달할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 관련사이트 : 앨리스인체인스 홈페이지, Would

 

 

★ 마이클 조지프 잭슨(Michael Joseph Jackson / 1958.8.29 ~ 2009.6.26)

 

 

 

 

5세 때 형제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에서 리드싱어를 맡았으며, 1969년 무렵부터는 자신이 직접 안무한 인상적인 춤을 가미하여 그룹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976년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꾼 이 그룹에서 1984년까지 활동하였다. 1971년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녹음하였으며 <스릴러 Thriller>(1982) 앨범은 9곡의 싱글 중 7곡이 톱 10에 들었으며 무려 5,890만 장이나 판매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다.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딸과 결혼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1996년 이혼하였다. 여동생 재닛(Janet)을 비롯한 그의 여러 남매들도 록가수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아이를 좋아하던 성품이어서 1992년 '성추행' 사건에도 휘말린다. 결국 부모님들의 사기로 무죄 판결이 났지만 아이들을 사랑했던 그리고 세계 대스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명타였다. 그리고 즉을 때까지 쫓아다니단 백인이 되고 싶어 여러차례 수술을 받았다고 하는 루머의 '성형설'. 사실 그는 백반증이라는 후천성 병에 걸린 환자였다. 세계적인 스타이기에 그걸 받아들이기도 팬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백인이 되고 싶어서 수술을 한다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소문이 퍼져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사실이 항상 진실은 아니다'라는 진리가 확인된 셈이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7월 8일부터 2010년 2월 24일까지 영국 런던 O2 아레나 등에서 콘서트 'This Is It'를 공연할 예정으로 일련의 컴백 콘서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그는 공연 준비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습을 해왔다. 50차례 열리는 잭슨의 런던 재기 공연 티켓은 발매된지 수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로 팬들은 그의 복귀를 반겼다.그러던 중 로스엔젤레스 자택에서 2009년 6월 25일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사망하였다. 마이클 잭슨 전기의 저자 다이앤 다이몬드(Dimond)는 사망 전 주에 코에 생긴 피부암 병변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잭슨은 수면을 위해 진통제와 더불어 진정제도 복용했다고 한다. 또 한 명의 스타가 우리 곁을 떠나던 순간이었다.

 

 

☞ 관련사이트 : 마이클잭슨 홈페이지, KIng of Pop 마이클잭슨, 마이클잭슨 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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