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속국으로 두었던 강대한 나라 고구려
신라 문무왕(AD 661~681) 비문을 추적하면서 비문에 나오는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김알지,신라 최초 김씨왕 미추이사금과의 관계를 살펴본 바 있다. [보고오기] 요약하면 문무왕비문에 나오는 투후 김일제는 BC 100년대에 흉노족 왕가 혈통으로 한나라에 벼슬을 한 인물로 경주김씨의 유래와 연관된 인물일 수 도 있으며 김일제 후손 중 김성(문무왕비에서 성한왕으로 추정)이 한반도로 건너와 김알지가 되었다는 추정이다.인정된 역사상 김씨가 처음으로 왕으로 등장한 제13대 미추이사금(AD 261~284)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블로그 글에서 신라 김씨왕조가 김일제와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고대왕조의 역사가 조선의 역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중국왕조의 역사가 한민족에 의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는 광개토대왕호태왕비와 관련하여 역사상 한 때나마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을 가능성을 추적한다. 신라내물왕(AD 356~402)때 신라는 왜적의 침입(AD 399년)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한다.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가 포함된 전쟁이었다, 이때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이 왜로 인질로 잡혀가고 내물왕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이 신라의 내물왕이 급하게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한 내용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 이듬해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낸다.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 군대는 신라를 침공한 왜를 공격하여 가야지역까지 단숨에 진군한다. 그리고 강력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철의 나라 금관가야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렸다. 신라 실성왕(AD 402~407)이 즉위한 후 내물왕의 아들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고 사마흔은 왜로 인질로 가게된다. 눌지왕(AD 417~458)이 즉위후 박제상의 활약으로 인해 사마흔과 복호의 구출과정은 삼국사기에 『우식곡(憂息曲)』으로 실려있다.이 때 광개토대왕의 출정은 신라영토 내 고구려군 주둔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부터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동안 신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신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것이다. 신라는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영락) 9년(399년) 기해년에 부여(백잔)의 잔당들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평양 아래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께 고하여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의 군대가 돌아와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광개토대왕 비문 中>
"옛적에는 신라 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신라 왕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광개토대왕 비문 中>
"고구려 사람들은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고 돌아갔다."<삼국유사 中>
"장수왕 52년(464년)이 정병 100인 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도록 하였다."<일본서기 中>
그러나 어느 날 신라가 반기를 들었다.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사가 신라사람에게 충격적인 말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곧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수탉(절풍모를 쓴 고구려인을 지칭)을 죽이자"며 고구려 주둔군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고구려는 신라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장수왕은 보복으로 군사를 보내 신라의 실직주성을 점령해버렸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 바로 북쪽 미질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494년에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소지왕때 백제와 동맹을 맺을때까지 끊임없이 내정간섭을 받은 것 같다.신라 호우총의 호우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비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 준다. 호우 밑바닥에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迂十')이라 쓰여져 있는데 광개토대왕 비문에 씌어진 것 과 동일하다. 아마 무덤의 주인공은 10개 정도만 만들은 호우를 소장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로 추정되는데 아마 고구려로 인질을 갔던 복호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영토는 어느 정도 되었을까 ? 중국사람들의 기록에 5세기 무렵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2,000리, 남북 1,000리였다. 이후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로 늘어났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동서 6,000리나 된다고 했다. 중국도 고구려의 영토가 계속 확대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수왕 때에는 `영평(營平) 2주(州)'를 지배했다. 영주는 오늘날의 대릉하 유역 조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평주는 만리장성을 넘어 난하 하류, 북경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넓은 곳이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다. 중국인들은 동북공정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싶어하지만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임을 확인하는 증거는 속속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독특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삼각형으로 된 마름모꼴 모자다. 이 모자가 `절풍모(折風帽)'다. 『절풍모』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모자 양쪽에 새 깃털을 꽂은 벽화의 그림이 바로 절풍모를 그린 것이다. 고구려 모자인 절풍모는 당나라에서도 엄청나게 유행했다. 천재시인인 이백(李白)까지 절풍모에 관한 글을 남겼을 정도다. "깃털 모양의 금으로 장식된 절풍모를 쓰고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춘다. 새처럼 나래를 펼치고 해동에서 날아왔다." 절풍모는 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중국의 서역 관문인 `돈황 석굴벽화'에도 나온다고 한다. 벽화에 새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쓴 고구려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중국을 가로질러 그곳까지 뻗쳤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덕흥리고분에 있는 유주자사 진에 대한 번역을 보자.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으로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였다. 진은 77살로 죽어 영락 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의 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영구를 옮겼다. 주공이 땅을 보고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때를 정했다. 날짜와 시간의 택함이 한결 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이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자리는 후왕에 이르기를, 무덤을 만드는데 1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에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두었다.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무덤 찾는 이가 끊어지 않기를... '
덕흥리 고분에 있는 글에서 유주자사 진에 대한 설명에 나오는 국소대형이나 영락 18년으로 보면 유주자사 진은 분명 고구려의 관직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인이거나 귀화한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유주자사 앞에 도열해 있는 태수들(연군:북경서쪽지역, 범양:북경지역)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영토는 한 때 북경을 넘어드는 지역까지 확장 될 수 있다. 그런데, 건위장군이나 공자등의 얘기는 왜 나올까 ? 중국에서 고구려에 유주자사 진에게 줄 관직을 명령한 것일까 ? 유주자사 진이 중국에서 관직을 지내고 고구려로 귀화하여 관직을 한 번 더 지낸 것일까 ?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광개토대왕이 세력을 넓혀갈 때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따라서, 통일된 세력없이 약한세력들의 이합집산이었고 그 시대에 고구려는 가장 강성할 수 있었다고 본다.영락18년 이라는 연호에서 알 수 있듯이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의 영향안에 있었던 사람이고 건위장군이라는 관직을 지내다가 여하한 이유로 고구려로 편입된후 다른 관직을 제수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보인다. 동이교위를 제수받은 것도 고구려가 세력을 넓혀가면서 지방정권을 두고 그 관직을 그대로 사용하게 했다고 추정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 동북공정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좀 더 지켜보자.
고구려 영토 지도 |
중국 집안현 광개토 대왕비 |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 덕흥리고분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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