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밥상 수라에 대한 이야기

식도락|2014. 5. 7. 22:02

수라는 고려말과 조선시대에 왕에게 올린 밥을 높여 부르는 궁중용어로서 몽골어라고 한다. '밥'이라는 한국말은 게림유사에 반(飯)을 박거(朴擧)로 음표하거나 화산삼재도에서 바비(波備)로 음표하면서 후대에 '밥'으로 고정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수라는 고려 원종 이후 몽골의 영향으로 몽골어로 음식을 '슐라'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본다.수라상의 반찬은 12가지로 정해져 있고 내용은 계절에 따라 바귄다. 수라상은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각각 받는데 동쪽에 왕, 서쪽에는 왕비가 앉는다. 겸상은 없고 시중드는 수라상궁도 각각 3명씩 대령하며 '원반''곁반''책상반'의 3개의 상이 들어온다고 한다.



 



조선시대 수라상 반배도

원반   : 흰수라,곽탕(미역국),조치(찌개),찜(선),전골,김치류,장류,12가지 반찬(젓갈,편육,회,수란,나물,생채,더운구이,전유어,구이,장과,포,조리개)
곁반   : 팥수라,곰탕,숭늉대접곡차,은공기3개,은접시 3개
책상반 : 전골,장국,고기,참기름,계란,각색채소



하루 2번 들어가는 임금님의 정식 수라상은 12첩 반상으로 12가지 반찬이 올라간다.밥(수라)과 탕은 물론,5가지 기본밭찬은 가짓수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수라는 백반과 홍반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먹었다. 백반은 흰쌀밥, 홍반은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이다. 팥은 소장에서 음식물이 정체되는 것을 막고 소변을 배출시켜, 몸에 축적된 열을 내린다. 찹쌀은 성질이 따뜻하여 비위를 따뜻하게 데우고  설사를 멎게하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간혹 대변이 굳어지고, 몸에 열이 쌓이는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찹쌀을 팥과 함께 섞으면 온열의 조화가 이뤄진다. 탕도 미역국과 곰탕 두 가지를 차렸다. 미역은 피를 맑게 하고, 숙변을 배출시키며 심장병, 동맥경화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곰탕은 원기를 보충한다. 기본 반찬에 속하는 조치(찌개류) 중 무젓국 조치는 무를 쇠고기 장국에 넣어 끓인 후,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음식을 말한다.  무는 위장의 기운을 아래로 내리게 하여 위장에서 음식물이 정체됐을 때, 이를 내려주는 기능을 한다.  특히 밀가루로 만든 면류를 먹고 체했을 때 탁월한 효과가 있다. 쇠고기는 비위를 보하고 근골을 강하게 한다. 또 간에 쓰는 새우는 성기능을 촉진하고, 임부에게는 젖이 잘나게 하는 음식이다. 또한 무와 쇠고기는 음 기운이 강하고 새우는 그와 반대되는 양기운이 강하므로 무젓국 조치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이룬 음식이다.  이렇듯 임금님의 수라상에는 반찬 하나 하나에 우주의 원리를 담아냈다.

임금들의 식사는 횟수부터 달랐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하루 다섯 번의 수라상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식사에 해당하는 수라상은 아침 수라와 저녁 수라, 두 번이었다. 두 번의 식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음식으로 가득한 상이었지만,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음식 위주였다. 아침 수라는 오전 10시에, 저녁 수라는 오후 5시였다. 오전 10시는 체내의 양기가 가장 충만하게 펼쳐져 있는 시간이고, 오후 5시는 하루의 기가 갈무리되기 직전의 시간이다. 따라서 이때 음식물을 섭취하면 음식물의 분해는 물론, 흡수·저장까지 원활하게 된다. 아침 수라 이전의 초조반상, 점심의 낮것상, 밤의 야참은 포만감을 느끼기보다는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정도였다.  초조반상은 주로 미음이었는데, 그나마 보약(탕약)을 먹을 때에는 거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새벽시간이 밤새 갈무리되었던 양기가 힘있게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시점인데  이때 음식 때문에 기운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빈 속에 탕약을 먹어 그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아침 수라 이후에 먹는 낮것상은 점심에 해당한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은 글자 그대로 유동식(미음이나 죽 등)이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야참도 면, 약식, 식혜, 우유죽 등으로 낮것상처럼 간소했다. 두 번의 식사 사이에 간식 정도에 해당하는 음식을 진상함으로써 위가 과도하게 비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장수의 비결로 식무구포의 양생법을 제시한다. 즉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배불리 먹는 것을 삼가라는 뜻이다.  임금의 수라상도 그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임금님의 수라상은 풍성함의 극치지만, 수라를 물린 후에도 떡 과자 차 화채 등으로 이뤄진 깔끔한 후식이 빠지지 않았다.   임금님의 후식으로 나온 떡이나 과자는 찹쌀, 밀 등의 곡물로 만든 것으로,  식사 때 여러 종류의 반찬을 먹느라 어지러워진 기운을 평화롭게 해준다.  또 단맛으로 위장의 기운을 느슨하게 풀어 주어, 남은 식욕과 공복감을 떨어뜨리는 역할도 한다. 붉은 팥 시루떡의 팥은 몸 안에 쌓인 불필요한 수분을 빼내는 역할을 한다. 또 찹쌀은 소화기관인 비위를 강하게 하고, 기운이 생기게 하는 효능이 있다.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과자는 기름에 튀긴 강정류, 과일을 익혀 꿀에 조린 숙실과가 있다. 강정에 들어가는 계피나 밀가루, 밤, 꿀, 대추, 깨, 콩 등은 모두 몸을 보하는 데 좋은 재료들이다. 그 중 계피는 속을 따뜻하게 하고, 혈맥을 잘 통하게 하면서 간, 폐의 기를 고르게 해주며 급성위장병으로 인한 경련을 가라앉혀 준다. 요즘 고기집에 가면 흔히 주는 콩가루는 두황이라고 하며 맛이 단 편이다. 위 속의 열을 내리는 데 좋다. 또 배가 불러오는 것을 없애고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 주로 술과 함께 고기를 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콩가루는 꼭 필요한 양념의 구실을 한다. 임자라고 하는 들깨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다. 기침과 갈증을 멎게 한다.  궁중의 차로는 제호탕이 대표적이다. 오매육과 초과, 백단향, 축사, 꿀 등을 넣어 달인 물로 시큼하면서도 향기롭다. 화채는 싱싱한 제철 과일로 즙을 내어 만들거나 오미자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오미자 화채는 오미자국에 배, 진달래꽃 등을 띄운 것이다.  오미자는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데, 특히 남자의 정력 증강을 돕는다.  그밖에 소갈이나 몸에 열이 많이 나 가슴이 답답할 때 먹으면 좋다. 임금님의 후식은 단순히 식후 기분전환이나 입안을 상큼하게 해주는 것을 넘어,  형식의 완결미 마저 느끼게 한다.



왕의 밥상을 책임진 주방장은 수라상궁인가 아니면 이조(吏曹)에 속한 조리사 숙수인가 ?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하면서 한류의 주역이 되기 도 했던 공간 수라간.하지만 그 실제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왕의 밥상 이 만들어지는 곳, 수라간의 비밀이 조찬소 그림에 숨겨져 있다 1604년. 선조가 마련한 연회를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를 살펴보자.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1604년,선조)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시는 나이든 노모들을 자식들이 모셔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에서 ‘선묘조’라 함은 조선시대 임금인 선조 때를 가리키며, ‘제재’라 함은 여러 명의 재상을 이른다. ‘경수연’이라 함은 당연히 장수(長壽)를 기념하는 잔치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2년(선조35) 가을,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예조참의 이거(李, 1532~1608)에게 99세나 된 노모 채씨(蔡氏)가 있다고 선조에게 알렸다. 7년간 계속된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노모가 살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선조는 나라에 좋은 징조라고 여겨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3년 4월에는 오로지 그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이거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이미 사망한 이거의 아버지에게도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여 채씨 부인을 정부인(貞夫人)으로 칭하도록 했다. 결국 이거는 1603년 9월 노모의 100세 생신날에 높은 벼슬의 관리들을 수십 명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어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605년 4월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제의로 나이가 70세 이상이 된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재상 13명이 참여하여 봉로계(奉老契)를 만들었다. 이들은 ‘우리들은 각자 노모를 모시고 있느니, 백세부인(百歲夫人, 이거의 어머니 채씨를 가리킴)을 모시고 함께 헌수(獻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경수연을 4월 9일 개최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조는 전국에 특명을 내려 잔치에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돕게 했다. 특히 난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나라에 풍악을 울리지 못하도록 했지만, 노모들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궁중의 악공들을 동원하여 음악을 연주하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분홍색 관복을 입은 남자들은 노모를 모신 13명의 재상들이고, 이들로부터 술을 받는 이들은 그들의 노모들이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1604년,선조)에 나타난 조찬소의 남자

 

이 그림의 두 번째 그림 ‘조찬소’에는 다소 낯선 모습이 등장한다. 그림 속, 부엌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모두 남성인 것이다. 창덕궁 수라간. 1920년대 현대식 부엌으로 개축 된 이곳에는 당시 사용했던 일제 오븐과 당시 쓰던 찬장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개축 전 조선의 수라간은 어떤 모습이었 을까?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은 대전과 왕비전 등 궁궐 곳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400여 명. 밥을 짓는 반공, 생선을 굽는 적색, 술을 빚는 주색 등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 에만 종사했다. 왕의 요리사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었고,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궐내에서 왕, 왕비, 대왕대비, 세자는 각각 대전, 중궁전(왕비전), 대비전, 세자궁의 전각에서 각각 기거하신다. 일상의 식사는 각전에 딸린 주방에서 담당이 정해진 벼슬아치나 차비들이 만들어 올렸다. 왕과 왕비의 침전에서는 수라를 드신다. 왕과 왕비의 수라를 만드는 곳을 수라간(水剌間) 또는 소주방(燒廚房)이라고 하며, 침전과는 별채에 배치하고 있다. 창덕궁의 수라간은 침전인 대조전(大造殿)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수라상을 올릴 때는 배선실에 해당하는 퇴선간에서 상을 차리고 물린 상을 정리한다. 생과방(生果房)에서 후식을 만들어 올린다. 그밖에 주원숙설소(廚院熟設所)에서는 궁중의 연회 때에 임시로 가가(假家)를 지어서 설치한 주방을 주원숙설소, 또는 내숙설소(內熟說所)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로 설치한 주방을 행주방(行廚房)이라 하였다. 사옹원(司甕院)은 조선 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출퇴근을 하는 수라간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발급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남자는 380 명 여자는 20여 명. 경국대전 역시 수라간 남녀의 비율은 15대 1로 명시하고 있다. 17세기의 소문사설 역시 남자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기록. 여성들은 상을 차리거나 수라를 나르는 등 간단한 일만 맡고 있었다. 1903년. 왕의 수라에 관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한다. 홍합을 먹은 고종의 이가 부러진 것이다. 요리의 책임자로 처벌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숙수 김원근(金元根), 사환 김만춘(金萬春), 숙수패장 김완성(金完成), 각감 서윤택(徐潤宅)” 그들의 이름은 모두 남자였다. “각색장(숙수)이 고역이므로 누구나 모두 싫어하여 피하였다” <중종실록> 실록에는 숙수가 되는 것을 꺼리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왜 궁중 요리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을까 ? 왕의 수라는 식재료 준비부터 숯불을 일구는 문제, 양념을 하는 문제까지 세심하고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다. 더욱이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수라를 들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숙수를 기피하자, 때로는 노비의 신분을 면천해주거나 역을 감면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남녀 구분이 엄격한 사회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일이었던 수라를 만드는데 여성이 참여할 수 없었다. 엄청난 노동의 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라는 점. 그리고 유교국가라는 조선의 특수성. 이로 인해 ‘숙수’라는 직업은 남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7첩반상

고종 요리사 안순환

창덕궁 수라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등장하는 정조의 7첩 반상. 흔히 상상하는 12첩 반상이 아닌, 소박한 수라상이다.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왕의 수라는 생각과는 달리 검소한 건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1907년. 고종의 양위와 함께 궁의 살림을 맡아보던 사람들이 대거 해고된다. 당시 고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은 이후 명월관이라는 조선 요리집을 열어 궁중요리를 보편화시킨다. 우리에게 익숙한 수라상은 조선이 패망한 이후 상궁들이 이어받은 것이었다. 현대와 비교하여 의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왕이 병이나기 전이거나 병이 아고 나서도 건강을 찾게 해 준 것도 수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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