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14강.역사철학 마르크스와 포스트모더니즘

샐각의창|2009. 5. 8. 00:16

역사철학은 플라톤에서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진다. 헤겔의 역사철학과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공통점 이라면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은 그가 속한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아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점이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이 역사적 현실을 주도한다고 했던 데 비해 마르크스는 물질적 경제 구조가 역사적 현실을 주도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의 변화는 생산 양식의 변화인데, 생산 양식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를 내용과 형식으로 한다.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이 역사 전개의 기본 동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계속되는 한 생산력은 부단히 발전하고, 발전한 생산력을 기존의 생산 관계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새로운 생산 관계가 출현하여 결국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합으로서 생산 양식이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은 역사 발전에서 소외된 인민 노동자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뚜렷한 실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지배 계급은 이해 관계상 필연적으로 기존의 생산 관계 즉 현존하는 재산 분배 관계를 변함 없이 고수하고자 한다. 따라서 생산 관계의 변화를 통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는 필연적으로 투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유물사관이다.

칼 마르크스(Kral Marx:1818-1883)가 그의 저서들 <<공산단 선언>>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을 통하여 사회적 계급투쟁과 경제적 결정론에 기초한 유물사관을  세운 시기는 아직 공황도 없었고 따라서 정부의 개입도 미미했기에 상품의 생산과 소비과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본주의의 역기능인 빈부격차의 극대화 또한 최고조에 달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생산자본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부려서 발생한 이윤을 거의 독식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어린이노동, 노동시간의 과중, 생계유지에도 벅찬 저임금 등으로 노동자들은 처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한 시대상황에 분노한 마르크스는 그 유명한 자본론을 써서 자본주의를 샅샅이 파헤쳤고 이러한 자본주의는 내부모순으로 인해 붕괴할 거라 주장했다.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경제적 생산력으로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 위에 법적,정치적,정신적인 상부구조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회적 계급투쟁에 의해 먼저 하부구조가 변혁되고 이에 따라 상부구조가 변혁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고대에서는 귀족계급과 노예계급이, 중세에서는 봉건제후와 농노계급이 각각 대립한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부르조아아와 프로레타리아가 대립하면서 후자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핵심은 무엇보다고 이윤의 추구라는 것,  노동의 가치는 물품의 가치와 동일한 방법으로 측정된다는 것, 노동자가 임금의 형태로 받는 가치는 생산에 필요한 소요임금사이의 관계로 정해진다는 것 등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사회주의의 실현에 의해 없어질 것이며 지상낙원은 반드시 이룩된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현 시점에서는 실패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이 변증법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며 역사의 발전이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변혁될 수 있다고 했으며 노예제에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가 실현되면 지상낙원이 이루어 진다고 했는데 공산사회 이후의 역사의 발전과정을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어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은 멈추게 된다.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역사는 계속 발전하여야 하므로 공산사회 또한 붕괴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이상사회가 붕괴되는 모순을 낳은 것이다. 공산사회가 오더라도 인간의 악한 의지에 의하여 또 다른 사회가 출현함은 이미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판은 자본주의 몰락을 예견하였지만 현대 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변증법적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체의 몰락을 박기 위하여 때로는 분배문제에 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생산의 문제에 관여하기도 하면 마치 HIV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공산사회가 성립되기 위하여는 인간들이 함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노동자.농민 또한 역사의 주체가 되더라도 가진 것을 나눌려는데 인색해 질 것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것이 가장 큰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비판선상에서 역사는 연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성이라고 주장하는 미셀푸코(Michel Foucault)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생각을 살펴보자. 그에 의하면 역사에 대한 파괴, 비연속성,분리등의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푸코의 역사관은 어찌보면 지층의 형태를 띠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층의 역사는 각각의 층은 자기 고유의 논리와 중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역사가 연속적이며 일의적인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며 단절의 형식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푸코는 기존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찾고 이를 통해 연쇄의 의미작용을 발견한 뒤에 이를 재구성하는 것에 회의를 품는다. 푸코는 역사가 경제, 제도. 종교, 과학, 문화예술 등 여러분야가 포함된 通史를 거부한다. 푸코에게 역사의 대상은 일관된 연속이 아니라 단절된 단층이 여러개 겹쳐진 비연속적인 지식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푸코는 역사를 고고학에서 역사의 지층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내려가듯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포스트 모던은 이성 중심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자명하게 여겨졌던 기존의 모든 지식 체계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고,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인간과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불신은 지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고 시대마다 권력과 지식이 결탁해서 각 시대마다 다른 그 시대의 지식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따라 역사를 주재하는 이성 역시 거부되므로 역사의 객관성이나 연속성은 보장받지 못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어떠한 동력도 없고, 인과적 설명도 없고, 목적성도 없다.

오늘날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변증법적 사회구조의 변혁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공산사회가 최종의 유토피아가 되는 공산주의적 사회주의 개념을 물 건너갔다. 인간의 역사는 지도자의 역활도 중요하지만 기층민의 합의를 불러와야만 계속적으로 유지가 된다고 본다. 따라서,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개선을 이룬답시고 완전히 검증도 안 된 근거에 기초한  계획으로 섣불리 달려드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진단된 문제점을 하나 둘 착실하게 고쳐나가면서 사상의 틀을 넓혀 나가는 것이 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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