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12강.자본주의하에서의 철학
자본주의 발달은 어떻게 되어왔을까 ? 1545년부터 스페인이 중남미에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들여왔고, 이것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면서 대부분 은화 아니면 금화였던 각국 화폐의 가치가 급락했다. 이것이 16세기~17세기 유럽 경제를 휩쓴 '가격혁명(The Price Revolution)'이다. 이로 인해 16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의 물가가 3~5배 이상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나 물가 급등의 충격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인플레이션으로 무역 상인과 가내 수공업자들의 이윤(利潤)이 늘어나면서 자본의 축적이 일어났다.초기 산업적 자본주의이다. 초기 산업적 바본주의는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영, 국제 무역의 확대로 전성기를 누린다. 이후 자본주의는 1873년 '장기 공황'(The Long Depression)의 시련을 맞는다.
미국과 영국의 '철도 버블'이 붕괴하고, 유럽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미국과 유럽 경제가 동시에 침체에 빠진 것이다.정부의 대응은 실패했다. 경제를 살리겠다며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잇따라 내놓은 것이 오히려 화를 불렀다. 국가 간 무역이 크게 줄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고, 침체는 1896년까지 20여년 이상 계속됐다.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라는 대외 팽창 전략 을 통해 해답을 찾았다. 1900년대를 전후해 미국과 유럽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를 개방시키고, 식민지화 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경제는 다시 달아올랐고, 자유무역과 세계 경제에 대한 낙관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제국적 자본주의 시대이다. 1929년 10월 29일 미국 주식시장의 대폭락과 함께 시작된 또 한 번의 실패가 찾아왔다. '대공황(大恐慌·The Great Depression)'이다. 빚으로 호황을 누리던 미국 경제의 버블 붕괴와 국제 무역의 감소가 원인이었다. '경제는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자유주의 이념을 버리고, 정부의 지출 확대와 독점자본 해체, 일부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전부가 경제의 조정자로 나섰다.일명 수정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다. 대공황 초기의 보호주의로 위축된 국제무역은 2차 대전을 맞아 미국과 유럽의 전쟁 물자 교역과 전시 자금 지원이 늘어나면서 회복됐고 글로벌 경제는 과거의 전성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73년과 1979년 또 한번의 자본주의 위기가 찾아온다. 원유의 가격급등으로 인한 석유파동이 찾아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이 오면 경기는 활성화 되는데 이 시기에는 물가는 오르고 경기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금융을 자유화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도래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으로 2007년 이후로 미국 부동산 버블이 오고 미흡한 금융규제가 다시 한 번 금융위기를 가져다준다. 이제 다시 정부가 개입하여 일명 수정금융자본주의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 오랫동안의 자본주의 역사는 자본주의에 정답이 없음을 말해준다. 상황에 따라 정부가 개입을 적극적으로 하든지 소극적으로 하든지 해야 자본주의는 다시 살아나곤 했다.
신자유 주의는 이제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끊임없이 통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인 듯 하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변용(變容)은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의 석유 파동이 몰고 온 전 세계적 스태그플레이션의 위기는 중동의 석유자본을 세계에 투자하는 국제 금융시스템의 발전과 1980년대 금융 자유화와 시장개방으로 이어진 신(新)금융자본주의를 통해 극복됐다. 하지만 이로 인한 글로벌 불균형의 심화와 신금융자본주의의 폭주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역사는 위기가 계속되는 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진화도 계속될 것이라는 역설(逆說)을 전하고 있다. 다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수반하느냐가 문제다. 이 과정에서 위기와 충격에 대응하는 정부정책의 역할이 핵심적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미셸 푸코(Foucault)는 "국가는 시장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틀이자 도구"라고 했고,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Kindleberger)는 "정부는 모든 금융위기의 최종 해결자"라고 말했다. 세계 경제가 미국발 금융위기로 위협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반복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지금은 과거의 학습 경험을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각 나라 정부가 글로벌 자본주의를 구해내기 위한 공조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을 거둔다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다시금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반대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각 나라 정부가 이기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면 글로벌 자본주의는 길고 긴 겨울잠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대한민국에도 경제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신뢰와 리더십 구축과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뉴딜 그리고 효과적 구조조정 등 세 가지를 주문하면서 경제체질을 바꿀 것을 주문한다. 자본주의에서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맹목적인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사회통합을 위해 경제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난제인 양극화현상을 해소해야만 사회 자체가 불안해 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철학이 더욱 더 중요시된다. 자본주의는 16세기 무렵 봉건제도하에서 싹터 18세기 중엽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산업혁명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출발인 셈이다. 중세 봉건사회는 봉건영주와 농노사이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르조아(뷔르거)는 영주로 부터 해방된 농노와 장원을 탈출한 농노들이 성장하여 이룬 도시 상공인 계층을 가르키는 말인데 훗날 자본가계급을 의미하게 되었다. 도시 상공인 계층이 성장하자 왕은 그들의 자본이 필요하게 되어 결탁이 일어나고 식민지 건설에 이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조아 계층은 더욱 더 부를 창출하게 되고 서서히 봉건영주는 쇠락하게 된다.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부르조아 계급은 중게 봉건사회에 심한 반발을 갖고 있었으므로 신분적 차별을 해소하고 만인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예속을 거부하고 독립된 개인의 자유와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 것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기초가 된다. 또한, 사적소유를 통한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생산수단으로써 노동력과 생산물의 소유를 인정하게 되는데 이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기초가 된다.
막스베버(M.Weber)는 "부르조아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룩해 낸 바탕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있다. 근면과 절제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의 은총과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다"라고 햐였다. 자본주의 경제윤리의 기초는 근면과 절제의 정신임을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 역시, 막스베버(M.Weber)가 얘기했듯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대표되는 도덕성과 윤리 의식이 결여된 자본주의는 타락한 형태를 띠게 되고 일명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경향으로 흐르게된다. 수정자본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 또한 천민 자본주의의 경향을 띠게 됨은 어쩔수 없는 귀결이다. 본디 자유주의는 국가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출발해, 중상주의의 대자본 특혜를 반대해 국가로부터 자본을 해방시키려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결합된 형태를 띠었다. 전자는 민주주의를 만들었고 후자는 자본주의를 낳았는데 '경제적 자유주의'의 경우 19세기 자유방임 시장주의의 구조적 결과인 공황과 빈부격차로 인해 국가의 개입이 요구됐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 케인즈주의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뉴딜'이, 유럽에서는 사민주의 복지국가체제가 2차대전 이후 60년대까지 이어졌다. 70년대가 되자 케인즈주의-복지국가는 '신자유주의'에 다시 바통을 넘기게 됐다. 그런데 그 모습은 19세기 원조 '경제적 자유주의'를 강조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그대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논란을 접어두고 자본주의를 철학적 접근 을 통해 생각해 보면 존재론적으로는 돈을 대상으로 하고 인식론적으로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생산과 노동의 상품화를 통해 가치론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 산업자본주의 하에서는 자유방임주의를 채택하는 데 '국부론'으로 유명한 아담스미스(A.Smith)는 "국가의 의존을 버리고 오로지 시장을 통한 자유로운 개인의 경쟁시스템을 통해 국부를 늘려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야경국가로만 존재하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그에 의하면 시장은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 문제없이 잘 돌아갈 것이며 각 경제주체가 개별적으로 이익을 추구해도 사회 전체적인 이익은 증대되도록 조절해 준다고 한다.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만능장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듯이 초기 산업자본주의는 제국적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설비투자 확산에 다른 과잉생산으로 실업이 발생하고 돈의 유무에 따라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는 등 문제가 발생된다. 미국이 겪은 대공황기를 거쳐 흔히 말하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국가가 경제정책에 깊이 관여하여 구민대책과 사회보장제도와 같은 부의 재분배정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혼합경제를 말하는 수정자본주의이다. 롤스(J.Rawls)는 '정의론' 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역차별적 분배정책을 취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이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잡았으나 그 후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에 따라 케인즈 학파의 이론의 타당성에 대하여 반기를 든 시카고 학파(Chicago school of economics)가 생성되었다. 시카고 학파는 통화주의자라고도 불리며 이 이론은 레이거노믹스의 근간이 된다. 신자유주의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즉 적자생존설로 우수한 자들이 살아남아 인류는 계속 사회적으로 진화 발전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 논리적 귀결로, 적자생존의 결과로서의 불평등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논리적으로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취하게 된다. 유명한 대처리즘도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금융의 세게화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 졌고 금융 자체가 부를 측적하는 근간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경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계화.무한경쟁.초국적자본.탈규제.노동의 유연화로 말할 수 있다.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미국의 중산층이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반감이 생긴다. 사회보장제도가 '빈곤한 흑인들만 도와준다'는 인종주의와 결합돼 적극적 소득재분배에 대한 반감이 생긴 것이다.이때 밀턴프리드먼은 스미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신자유주의로 돌아온 현재의 자본주의는 결국 자유주의 시대의 천민자본주의 적인 빈부격차와 불황이라는 문제를 다시 안게 되었다.도대체, 자본주의의 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방임이 유효한 수단일까 통제가 유효한 수단일까? 예일대 경제학과 로버트 쉴러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는 규제가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며, 우리에게는 착한 행동을 강요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선의를 갖고 있는 게 아니며 모두가 관대하고 공익정신을 갖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제한할 규칙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시장은 움직여야 하는 생물이다. 하지만, 통제하지 않으면 겉 잡을 수 없는 암덩어리로 악화되는 것이 돈의 속성인 것을 역사상 많이 보아왔으니 통제는 필요한 듯 하다. 통제의 강도는 경제수단별 조정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머리가 더 아플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극복방안은 없는 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에서 잠시 살펴보도록하자. 미국의 거대한 자본주의에 늘 정신적 대립각을 세워 온 유럽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3세대에 걸쳐 시도했었다.1세대의 극복시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거대한 관료주의의 괴물로 치달음으로써 실패했다. 소련의 붕괴가 이를 입증한다.2세대는 네오 마르크시즘운동으로서 관료화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 이성에 의하여 소외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목표로 하는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 이른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사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들의 철학사상이 지닌 고매한 도덕적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거리감을 지울 수 없었다. 첫째로 60년대 내가 유학생이던 당시의 한국은 아직도 고도자본주의 사회에로 진입할 기미도 없었던 저개발 최빈곤국이었다. 반대로 신좌파운동은 그들 사회가 이미 맛보고 있는 풍요한 고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그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인데, 이들 사상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이 경고한 ‘지식인의 아편’인 혁명적 관념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둘째로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현실성에 큰 의문을 가졌었다. 관념적으로 아무리 멋져도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면,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와 같다고 늘 생각했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연습장이 아니기에, 관념적 사유로 현실을 대체하겠다는 혁명적 발상을 나는 저어했다. 특히 1세대 ‘사회주의=관료주의’의 실패가 늘 나로 하여금 2세대 신좌파운동의 사상에 선 뜻 동의하기를 어렵게 했다. 더구나 그 당시에 나의 철학공부를 이끌어 주던 두 정신의 스승이 있었는데, 프랑스의 메를로-퐁티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전자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실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낭만적 허구를 보고서 이상주의 사상의 거짓을 고발한 철학자였다. 그는 또 현실역사가 이성의 빛과 의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정리하지 못하는 애매모호성으로 엮어진다는 것을 서술하면서, 인간역사를 오직 의미의 역사로 환원하고자 하는 과잉 도덕적 명분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후자는 가톨릭 철학자로서 인류의 역사세계가 이미 ‘깨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에서 악을 박살내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진 절대선 지향이 결국 국가주의적 나치즘과 계급주의적 공산주의와 같은 광적인 격정의 정치체제를 만들게 된다고 고발했다. 다음 3세대의 자본주의적 비판운동이 다시 등장했다. 해방적 이성의 자기 소외극복 운동으로 마르크시즘을 승화시키려는 2세대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 마당에서 생긴 포스트 모던적인 운동이 3세대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너무 농염하게 성숙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새 사회를 창조하기가 어려운 경지에 이르러, 비마르크스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이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의 푸코, 들뢰즈, 알튀세르, 보드리야르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상의 운동이 생겼다. 이들 사상의 공통점을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적 정치권력의 상품적 대중화를 비판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심어 놓는 무의미한 허무주의적인 흐름을 그대로 빨리 노출시켜 자본주의가 허무주의로 종말을 맺게끔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들은 약간씩 허무주의자들이다. 들뢰즈와 알튀세르가 좌우간 자살로 삶을 마감했고, 푸코가 에이즈병에 걸려 5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특이한 일이겠다.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을 잠시 훑어보자. 단적으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은 초월의 정신을 망각한 현대 소비사회의 정신부재의 경박성을 슬퍼하면서, 그런 삶의 경박성의 원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자본적 본질인 모든 것의 기호화(signalization)에 있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물건은 어떤 가치에 대응했었다. 사용가치든 교환가치든 물건은 인간의 구체적 욕망의 충족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집은 어떤 정신적이고 내면적 가치를 가족에게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단지 상상적인 상품의 기호적 가치만을 지시해서 헌 물건 버리고 새로 사듯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의 소비품목에 불과하다.TV프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리모컨으로 쉽게 손가락 끝으로 바꾸듯, 모든 것은 소비자의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와 같은 ‘환영’(幻影=simulacrum)에 불과하다. 고도소비사회에서 자동차도 기능가치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나 삶의 스타일이나 허세나 으쓱대고 싶은 욕망의 환영을 만족시켜 주는 일시적 대용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환영은 마치 옛 사회주의 소련의 한 청년이 서방 자본주의의 대명사 같은 블루진을 입고 다니거나, 아프리카 부시맨의 어떤 사나이가 비행기에서 떨어진 서방 콜라병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싶어하는 그런 환영과 유사하다 하겠다. 중요한 것은 블루진이나 콜라병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차이의 기호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가치유물에 불과하고,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흉내내기’(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든 흉내내기의 환영은 소비사회가 부추긴 차이화의 조작 코드에 인간이 멋모르고 덩달아 춤추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연상시킨다고 보드리야르는 진단한다. 차이와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소비자가 차이의 환영 속에서 각각 섹시(sexy)해지기 위해 돈을 마구 쓴다. 섹시하다는 것은 소비시장에서 상품으로 잘 전달되기 위하여 남들을 유혹하는 기호고, 각자는 대중사회에서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과감히 더 섹시하게 튀어 보이게끔 스스로를 기호화한다.
모든 이는 다 섹시한 차이를 연출하기 위해 환영을 좇는다.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 ‘소비사회’에서 기술한 것처럼 ‘소비는 기호(sign)가 흡수하고 기호에 의하여 흡수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비쳐진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 유리처럼 투명하나 절연체와 같은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의 상품을 훑어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도 자동차 유리를 통하여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사람들이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금방 지나가는 일시적 참상에 불과하고,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그것은 TV화면의 순간적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사람들이 지하철에 우굴거리나 그들이 사람들이라고 여겨지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환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냥 사람 비슷한 환영들이 득실거릴 뿐이다. 아무도 대중을 사람들의 실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현실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차가운 기호로 대체되어 실제로 느낀 척 흉내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소비사회를 형이상학적 근거를 상실한 ‘환영’의 사회,‘흉내내기’의 사회라고 불렀다. 이런 사회를 그는 또한 실재가 증발되고 환영이 진짜보다 살을 그 위에 더 덧붙이는 ‘초과실재’(hyperreality)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이 초과실재가 바로 환영이고 흉내내기의 허상과 같다. 그는 이런 환영의 흉내내기와 같은 기호가치(value-sign)만이 비대해진 소비사회에는 환영처럼 무수하게 지나가는 기호적 ‘초과실재’에 의하여 인격의 파탄이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런 파탄을 그는 ‘내파적 폭력’(implosive violence)이라 불렀다. 예컨대 게임이나 쇼핑에 미친 사람이 상상적 초과실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자기 내부에서 환영으로 배가 불러 파열한다. 본디 내파(內破=implosion)는 음운론적으로 외파(外破=explosion)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영어의 ‘tap(탭)’,‘cut(컷)’에서 파열자음의 음가인 't','k' 등이 첫 발음에서는 바깥으로 폭발하는 외파적 파열음이 되지만, 끝 발음의 파열자음인 'p'와 't'는 밖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파열이 잠기는 그런 음가를 지닌다. 이것이 외파음에 대한 내파음의 의미다.
과거의 문명은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외부의 모순(계급투쟁)으로 외파하는 구조를 지녔지만, 현대 소비사회의 본질은 스스로 인간이 기호처럼 흉내내기를 하다가 많은 기호에 헛배가 불러 내부에서 내파하여 폭발하는 폭력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본 소비사회에 대한 허무적 진단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3세대의 주장인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이 소비사회의 병을 진단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소비적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약이 아니고, 오히려 허무주의적 결말을 예견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풍요와 편리, 그리고 낭비와 배금주의를 동시에 가져온 이중적 얼굴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서구의 사상은 마르크스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병리(病理)를 잘 보았으나,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리(生理)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나도 그 생리를 알지 못해 많은 시간 헤맸지만, 최근에 해체적인 존재론적 사유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생리의 길이란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이기적이고 물질적 소유론을 그 동안 서구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당위의 가치론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하였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마르크시즘이나 네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의 본능적 소유론에 비하여 반본능적 정신의 소유론에 다름 아니다. 본능적 소유론을 치유하는 길은 역시 자연적 존재론에 의해서 가능하지, 인위적 당위론으로 불가능하다. 보드리야르의 허무론도 결국 형이상학적 실체의 붕괴를 소비사회가 촉진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생긴 반본능적 형이상학적 소유론에 대한 그리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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