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傾國之色) 절세가인(絶世佳人) 탐방...중국

샐각의창|2011. 4. 10. 14:59

 

인생지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 미인 앞에 초월하는 현자들도 많았지만 인연의 끈이 연결되면 지극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만다. 더군다나, 경국지색일 경우는어디 쉽게 초월되겠는가. 경국지색(傾國之色) 이라는 말은 미인을 가리키는 말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라를 기울게 할 미인이라는 말일텐데 그 어원은 한나라 때로 올라간다. 한나라 무제(漢武帝 劉徹, 기원전 156년 ~기원전 87년) 때 이연년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음악적 능력이 탁월해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 무제도 그를 곁에 늘 가까이 두고 총애하였더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연년이평소처럼 임금님 앞에 나아가 노래를 불렀다.

 

 

"북방 저 멀리 아름다운 가인이 있어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의 미모라네. 한 번 고개 돌리면 성이 기울고 두 번의 고갯짓에는 나라가 흔들린다네. 성 잃고 나라 기우는 일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절세가인은 두 번 얻기 어려우리"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 傾國 佳人難再得 - 歌一首

 

 

이 노래를 듣고 있던 한 무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여인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 이 탄식을 듣고 있던 한 무제의 누님인 평양공주가 한무제에게 다가가 귓말을 하였다. "내가 일전에 들으니 이연년에게는 누이동생이 한 명 있는데 천하에 둘도 없는 절색 이라더군요" 이 말을 들은 한 무제는 즉석에서 이연년을 불러 누이동생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연년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한무제는 "그대의 누이동생이천하절색이라던데 나에게 한번 소개시켜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연년의 누이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말 그대로 절색에 춤과 노래까지 뛰어나 한 무제는 한눈에 그녀에게 빠져 궁으로 불러들이니 그녀가 바로 중국 역사에 유명한 '이부인(李夫人)'이었다.

 

 

 

 

이부인이 궁에 들어온 이후 한 무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이부인과 놀기에 바빠 나라는 차츰 기울게 된다. 결국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이연년의 노래에 나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엔 다시없을 천하절세 미인을 가리켜 '경국경색의 미모'라고 부르게 된다. 이 것이후에 경국지색이란 단어로 고착된다. 중국 역사에 나오는 경국의 미색들이 어찌 한 둘 이었으랴만 여기서는 역사에 소상하게 기록되기 보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고대의 경국지색의 면모를 훑어보면 감회가 새롭다.

 

 

북방 의 절세가인(絶世佳人) '이부인'

 

 

이부인은 어여쁜 용모에 성격마저 천상 여자이니 한무제는 그녀를 정말 애지중지 총애하였다. 헌데 하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법이 아니든가.그녀는 몸이 많이 병약하였다. 더욱이 천한 창기 출신인 그녀가 궁에 들어오자 궁중의 눈총과 질시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이 이야기는 『한무지련』이라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몸도 약한 상태에서 궁중의 암투에 시달려야 했으니 그녀의 병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임종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한무제가 그녀를 위문하였는데 이부인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창읍왕(이부인이 낳은 아들)과 그녀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만 간곡하게 하였다.“저의 중병이 오래되어 얼굴 모습 또한 추하게 변해 버려 황상을 대할 수 없사오니 청컨대 제가 죽은 다음 제 아들과 형제들을 잘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부인의 병이 이렇게 중하다 하니 그대의 모습이 변했을까 걱정되는구려. 하지만 내게 그대의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나서 그 부탁을 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소?”“저희 부녀들은 용모에 치장을 하지 않고서는 감히 높으신 어른들을 대하지 못하는데 저 또한 이 모습으로는 황상을 대면할 수는 없습니다”“부인, 나에게 한번만 보여주시오. 그대에게 천금을 내리고 형제들을 대관으로 봉하리다”“대관에 봉하고 봉하지않고 하는 것은 전부 황상의 권한이니 저를 보고 안보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무제는 집요하게 이부인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하였으나 이부인은 곧 등을 돌려 울기 시작하니, 무제는 결국 이부인을 보지 못하고 성이 나서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무제가 떠난 다음, 좌우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결사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결국 황상을 화나게 한 이부인을 원망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이부인은 이렇게 답한다."그대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폐하에게 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거예요. 나는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 천한 신분으로 폐하께 사랑을 받았어요.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랑을 받던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없으면 사랑도 사라지는 법이에요. 폐하께서 그처럼 열심히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옛날의 나의 얼굴이에요. 나는 지금 병으로 이처럼 보기 싫은 얼굴이 되어 버렸는데 만일 .이 얼굴을 폐하가 보셨다면 분명히 기분이 상해버리셔서 형제들을 돌봐줄 마음이 없어지실 거예요." 이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모여 있던 여자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통곡을 했다. 이부인이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자, 무제는 황후의 예에 따라 장사를 지내고 축조 중인 자신의 능묘와 가장 가까운 곳에 그의 능을 만들었다. 과연 이부인의 예측대로 무제는 이부인을 그리워하기를 그치지 않아 이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궁내에 걸어 두었고, 그의 오빠인 이연년에게도 높은 벼슬을 내린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부인의 혜안이 사실로 이루어지는 순간들 이다.그의 오빠인 이연년은 후에 이름을 이광리로 개명하였다. 그런데, 누이와는 달리 그는 안하무인이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그가 흉노전쟁에 나가 참패하였는데, 무제는 이부인의 체면을 보아 이광리를 감싸주었는데대신 이광리의 작전 실패로 흉노의 포로가 된 이릉(李陵)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에 한 신하가 나서 이릉은 충신이라고 변호하다가 그만 고자가 되는 궁형을 받았는데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다. 아무튼 오빠는 그렇다치더라도 이 이부인은 현숙하고 아리따운 여인으로 알려 전해지는데 중국 7월의 꽃으로 불리는 추규(秋葵 또는 촉규)가 바로 이부인을 상징하는 꽃이다.

 

 

아름다운 미인이 주렴을 드리우고 깊숙이 들어앉아 고운 이마 찌푸렸네. 단지 눈물 진 흔적만 보일 뿐 누가 그리 한되는지 그 마음 모를레라.

 

美人捲珠簾 深坐嚬蛾眉 但見淚痕濕 不知心恨誰 - 李白 怨情

 

 

넓은 땅 만틈이나 많은 경국지색의 미인들이 많은 중국이였지만 중국에서는 4대 미인(서시,완소군,초선,양귀비)를 최고의 미녀로 꼽아준다.4대미인을꼽을 때서시 대신에조비연(趙飛燕)을 꼽기도 한다. 서시와 조비연이 이렇게 들고 안들고 하는 이유는아무래도 천한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왕소군,초선,양귀비 보다 중국사가들의 입맛에 덜맞다는 것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중국 의 4대미인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 구천 (재위 BC 496∼BC 465) 때 서시(西施)라는 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절강성 사람으로 성은 시(施)이고 이름은 이광(夷光)이며 별명은 서자(西子)이다. 서시가 살던 마을인 저라촌은 동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시이광, 즉 서시는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시라고 불리게 되었다. 서시가 바로 '침어'의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그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서시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노라면 물 속의 고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넋을 잃고 바라보며 자신들이 서시보다 못생긴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감히 떠오를 수 없어 모두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침어(沈魚)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기원전 494년 오나라와 월나라가 전쟁을 하였는데 월나라는 패하여 오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월나라는 많은 보물을 오나라에 바치고 신하의 나라로 자처하게 되었다. 월나라왕 구천(句踐)은 미인계를 쓰리라 결심하고 자신의 심복인 범려(范蠡)에게 월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찾아오라 시켰다. 범려는 완사계(浣紗溪)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서시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남녀의 정보다는 국사를 우선해야 하였으므로 사나이 대장부의 피끓는 마음만 간직한 채 사랑하는 여인 서시를 뽑아 적국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서시는 오나라에 간 후에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오왕 부차를 주색에 빠지게 하여 국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였다. 동시에 부차와 오나라의 대장인 오자서를 이간질하여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런 후에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숙원을 풀게 되었다.서시의 일생은 전기적인 색채가 충만하다. 산촌에서 빨래하던 일개 여자가 나라의 부흥이라는 중책을 맡고 결국 사명을 다한다. 동시에 자신의 미모와 재능으로 애정을 독차지한다. 서시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효빈』(效嚬 흉내낼효,눈살찌푸릴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흉내낸다"는 뜻으로 ,쓸데없이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서시는 가슴앓이병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이 가슴앓이 병이 바로 폐결핵이라고 한다. 자료에 보면 서시의 피부가 너무 고와서 세상에서 가장 희다는 뜻으로 『천하백(天下白)』이라고 하는데 폐결핵에 걸리면 얼굴이 희다못해 창백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지 서시는 가슴이 아파 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살을 찌푸리곤 하였는데 워낙 서시가 미녀였기 때문에 이마저도 아름다웠다.그런데 동쪽 마을에 동시東施라는 아주 못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선천적인 가슴통증이 있었던 서시가 길을 가다 갑자기 통증을 느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렸는데 그것을 본 동시는 그것이 서시가 남들에게 미인으로 인정받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자기동네로 돌아와서 자기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돌아 다녔다. 남들이 모두 서시의 찡그린 모습도 예쁘다고 칭찬하자 자신의 얼굴은 생각지도 않고 따라한 것이다.그리하여 동시효빈(東施效嚬)이란 말이 생겼다. 『서시빈목(西施嚬目)』, 『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는 말도같은 뜻이다.월나라가 오나라를 이긴 후에 서시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월나라의 대장인 사랑하는 남자 범려와 함께 은둔의 생활을 하며 일엽편주에 몸을 맡기고 서호를 떠났다고 전해진다."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할만한 경국지색이다.

 

 

 

 

 

 

한원제(漢元帝) 시대에는 그 유명한 왕소군(王昭君)이 있었다.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 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 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 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 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 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은 이랬다. 그 시대 궁녀로 들어간 여인들은 화공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만왕의 눈에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온갖 물품을 바치며 화공에게 줄서기가 이루어졋다. 하지 만, 왕소군은 가난하여 바칠 재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그렇게 그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돈의 힘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 하였으 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 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왕소군은 흉노에게 시집가서 오히려 질긴 일생을 산 미인인 셈이다."기러기도 떨어진다"는 '낙안落雁'은 한나라 때의 미녀 왕소군(王昭君)과 관계가 있다. 왕소군의 이름은 장(궁녀벼슬이름 장)이며 소군(昭君)은 그녀의 자다. 서한 원제 시대 사람으로 고향은 지금의 호북성이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 고 영리하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왕소군이 국경을 넘어 흉노족에게 시집을 갈 때 등에 지고 있던 비파를 내려 말 위에서 애절하게 한 곡조 뜯고 있었다. 그 곡이 어찌나 슬픈지 멀리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던 기러기떼들이 귀기울여 듣고 있다가 왕소군의 미모를 보고는 너무 놀래서 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는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기러기가 떨어진다는 뜻의 '낙안落雁'이란 말이 생겨났다.위에 말했듯이 왕소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왕소군이 17살 때에 한나라 원제는 천하의 미녀를 찾는다고 포고하였다. 소군은 이때 미녀로 뽑혀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의 황제 는 사치스럽고 음탕하여서 후궁들은 몇천명이나 되었으므로 원제는 화공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서 밤마다 잠자리를 함께 할 후궁을 물색하였다. 수많은 후궁들은 황제의 처소에 들기 위하여 화공에게 좀더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주기에 바빴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 같은 것을 줄줄 몰랐기 때문에 화공은 왕소군의 얼굴에 주근깨를 그려 넣어 밉게 만들어 한번도 황제의 처소에 들지 못하고 후미 진 궁 안에서 비파를 벗삼아 오랫동안 지내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왕소군이 자신을 희생하여 국경을 넘어 흉노에게 시집을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소군이 국경을 넘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 원제는 이 해를 '경녕(竟寧)'이라 개원하였는데 그 뜻은 변경이 안녕하다는 뜻이다. 한 원제는 그녀를 그리워 한 것인지 왕소군이 떠난지 3개월 뒤 생을 마감한다.한야선우는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 氏)'에 봉하였는데 그 뜻은 왕소군을 흉노의 황후로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이때부터 국경은 평안을 얻기에 이르렀다. 후세사람들은 왕소군이 고국을 떠나 흉노에 가서 우호를 맺은 영향이 후세에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칭찬을 하곤 하는데 주은래도 일찍이 왕소군을 "중화민족을 대가족으로 단결하도록 하는데 가장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역사서에서는 왕소군이 "스스로 자청 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서의 기록일 뿐 왕소군이 정말 그랬을까는 미지수이다. 중국에서는 역대로 왕소군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7백여 수의 시가 남아있으며, 또한 소군출 새(昭君出塞)라 하여 소설, 희곡 작품도 많이 있다. 이백, 두보, 백거이, 왕안석등도 왕소군에 관한 시를 썼으며 두보는 왕소군의 무덤에 찾아가 술 한잔을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근현대 작가인 곽말약, 조우(曹禹), 전한(田漢), 노사(老舍) 등의 작가들도 왕소군에 관한 작품을 썼다. 왕소군의 일생에서 중국인들의 단결력을 기막히게 엮은 것이다.

 

 

 

 

 

초선(貂蟬)은 중국 위오축 삼국시대(AD 220~280)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 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고 전해진다.실제로는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난 후 동탁의 잔당이 다시 집권하자 여포의 친구가 초선을 숨 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라면 초선은 동탁이 죽은 후에 여포의 품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국지에는여포의 애첩 초선이 미인계로 동탁을 죽게 만든 초선과 다른 인 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동일인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아마도 여성의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한 작가가 독자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 소설의 스토리를 초선이 자살한 것으로 수정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유명한 초선의 미인계 이야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진수의 삼국지에 의하면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정을 통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녀가 초선일 가능성은 많지 않고 설령 초선이였다고 해도 그녀가 동탁과 여포를 이간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초선이 여포의 부장의 아내였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여포가 초선 때문에 동탁과 불화하여 동탁을 죽였다는 소설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는 허구가 될 것이다.하지만 초선이 실존 인물이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초선이 중국 4대 미녀라는 칭송을 받은 것은 당나라 시대로 나관중의 삼 국지연의가 쓰여진 것보다 훨씬 더 먼저로 추정되기 때문이다.초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초선과 관우와의 로맨스이다.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을때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미녀들을 선물했는데 이 중 하나가 초선이였지요.관우는 초선의 절세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초선은 관우의 영웅적인 모습에 반하여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지만 초선 으로 인하여 유비에 대한 충성심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관우는 초선에게 자결을 명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사실로 보기 힘들지 않겠는가.또한, 조조가 아무리 관우를 아꼈다고 해 도 절세의 미녀 초선을 내어 주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까 말이다.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 685~762) 때인 719년, 경국지색(傾國之色), 절세가인(絶世佳人)의 상징인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태어났다.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인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 그리고 가무에 뛰어난 솜씨를 지녀 현종의 마음 을 사로잡아 시대의 흐름을 바꾸면서 일세를 풍미하다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현종이 나라도 팽개치고 연애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던.그녀는 실제 얼마나 이뻤을까? 중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양귀비는,약간 통통한 몸매에 쌍거풀은 없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모습이다. 초상화는 실제 양귀비가 살았던 중국황제의 별장,당화청궁(唐華淸宮) 에 걸려있는 그림을 다시 그린 것이다. 양귀비는 체중이 79kg이나 됐다고 하니,초상화와 같이 실제로도 통통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화청궁은 큰 호수로 이뤄져 있어 화청지(華淸池)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는 황제와 양귀비가 사용했던 목욕탕들도 있고,연못 주변에는 웅장한 건물들이 둘러 서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안이라 불리웠던 섬서성 서안에 있다고 한다.당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 762)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고 고모할머니가 바로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 황제로 유명한 무측천(則天武后, 624~705)이다. 현종은 황제등극 초기 한동안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백성들이 살기 좋은 태평의 시대 개원의치(開元之治)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재상들을 주변에 두고 정치를 잘 하였으나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무혜비(武惠妃 699~737)의 사망과 양귀비와 의 만남과 더불어 정치는 몰락의 시대로 접어든다.양귀비(楊貴妃 719~756)는 애초에 현종과 무혜비의 18번째 왕자 수왕 이모의 궁녀로 17세이 궁에 입궐(735년)하였다. 비파연주와 외모가 뛰어나고 제주가 있던 양귀비는 현종의 딸인 함의공주의 결혼식에 연주자로 참석 했다가 수왕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수왕의 비가 된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 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 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양귀비도 본래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 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 지 위씨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다. 양귀비가 "귀비"에 책봉된 이후로 그녀 의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큰오빠는 홍로경, 작은오빠는 시어사, 남동생은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큰언니 옥패는 한국부인, 셋째언니 옥쟁은괴국 부인, 여덟째언니 옥차는 진국부인에 봉해졌다.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했다.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괴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한번은 괴국부인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와 부마의 행열과 마주쳤는데,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평소 공주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빼앗고 부마의 관직마저 박탈하였다. 궁궐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주나 부마보다도 위에 있었던 것이다.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어느날 현종은 괴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솟아 올랐으 며, 그래서 한번은 현종이 또 양귀비에게 괴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에게 명 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그 뒤 다시 선우중통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괴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다.따라서 괴국부인으로 인해 시 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다.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 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로 보냈다. 그곳에서 현종은 양귀비를 품에 안게 된다. 그간의 다툼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 의 명재상 요숭과 송폭의 보좌로 "개원성세"를 이루어냈지만,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을 맞이하였다.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 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유역의 호인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 르게 되었다.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천보 6년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 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 켜주곤 했다.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 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 물렀던 것이다.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 상 위견소,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지금의 섬서성)에 이르렀으나, 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 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그리워하였다고 전한다.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 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믿거나 말거나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 에 죽었다는 것이다.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羞花(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 현종과 만나기 이전 ,어느 하루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 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 그러 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 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장한가(長恨歌)는 현종 붕어 50년 후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806년 나이 35세 에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쓴 것이다.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어떤 사랑이 고귀하고 어떤 사랑이 천한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른다.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에 빠져지내던 10여년 사이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라 백성들은 고통의 나락에 떨어 졌으며 나라는 혼 란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현종과 양귀비는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668년)를 명망시키고 통일시대로 접어 들던 시대이다.남녀 사이의 사랑은 그 어떠한 장벽이라도 넘어서 한번쯤은 몸 던저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순수한 인간삶의 행위인 것인가 ? 하지만 이런 미녀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서시는 서시의 발은 너무 커서 늘 긴 치마를 즐겨입었다고 한다. 왕소군은 어깨가 흘러 처져서 늘 망토를 즐겨 입었다고 하고 초선은 귓볼이 작아서 귀고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양귀비 또한 암내가 심해서 향수를 바르고 하루에 목 욕을 여러차례 했다고 한다. 완벽한 여자는 없다는 말이 사실일련가 ? 위에서 조비연(趙飛燕)을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한성제(漢成帝 BC33~BC72)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조비연( 趙飛燕)은 중국사극 '모의천하'에도 등장한다.그의 자매 조합덕(趙合德)도 한성제(漢成帝)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한서(漢書)에서 왕황후전을 제외하고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긴 것은 조씨 자매가 으뜸일 것이다. 한서열전의 내용을다 올렸다가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그녀의 초상화만 올려둔다.

 

 

 

 

중국 4대미녀를 말할때 수식어가 "침어낙안, 폐월수화"이다 浸魚는 서시 落雁은 왕소군 閉月은 초선 羞花는 양귀비를 말함이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한 표를 주겠는가 ?

 

 

중국 의 4대 악녀

 

 

최초의 경국지색의 악녀는 하나라의 걸왕의 비인 매희(말희,末喜)로 볼 수 있다. 매희는 걸왕이 토벌중에 잡아와 포로가 된 여자로 포악한 걸왕과 매희의 음락행위로 결국 하나라는 멸망하게 되는데 말희(末喜)는 하나라의 마지막 제왕 걸왕(傑王,~BC1562)의 왕비 중 한 명이다.

 

 

 

 

 

매희는 산동 유시씨의 딸이었는데 걸왕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진상품으로 바쳐진 여인이다. 일설로는 당초부터 걸은 말희를 요구하였다고 전해진다. 절세미녀라는 말희를 걸이 비로 삼아 사랑하였다. 걸왕은 그녀를 보자마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매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요대(瑤臺)라는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 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매희는 이내 싫증을 냈다."이렇게 3천 궁녀들에게 일일이 음식을 나눠주고 술을 따르는 것은 너무 지루하옵니다. 차라리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마시고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폐하?""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멋진 잔치를 벌여본 제왕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오." 그리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매희(말희,末喜)는 처음부터 딴 생각이 있었다.'내 조국이 이 자의 칼 아래 유린당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한낱 노리개가 되어 붙잡혀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 한이 없구나.'하고 생각했다고 전한다.주지육림의 공사가 완성되자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고 북소리에 맞춰 안주를 먹는 기이한 풍경이 매일 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걸왕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고 호소하는 충신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 나갔다.충신이었 던 관용봉(關龍逢)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용기를 내어 간언했으나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또 다른 충신이었던 이윤(伊尹) 역시 걸에게 간언하려다가 겨우 죽임을 모면하였다. 하나라의 제후이자 제후 의 우두머리 격인 방백(方伯)이었던 은(殷)의 탕(湯) 역시 백성들을 위해 걸에게 여러 차례 올바른 정치를 진언했지만, 오히려 다른 이들처럼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가 진상품을 바쳐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일이 있은 후 걸의 옛 부하인 이윤과 탕을 따르는 제후들이 걸을 쫓아낼 것을 건의하였고, 탕 역시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걸 토벌의 포고를 내걸었다. 결국 하나라는 은(殷)나라의 탕왕이 이끄는 군 대에 멸망하게 되었다. 걸과 말희는 생포되어 의 남소산(南巣山)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것을 하상혁명 또는 은혁명이라 부른다. 매희(말희,末喜)는 달기,포사,하희와 더불어 4대 요녀로 불린다. 모두들 나라의 멸망과 관련있는 미인들이다.4대요녀가 나라와 멸망과 온갖 방탕음란에 그 근거가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재 조명되어야 하지않나 싶다.역사는 승자의 몫이다.매희를 요 녀라고 보기에는 그녀의 속가짐이 서시에 비유되는 것 같아 어찌 찜찜하다. 숨겨진 역사의 아이러니가 얼마나 많겠는가 ? 후대인들 마저 회화에서 마저 악녀로 그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인물로 본다 면 그녀의 평가가 아깝다.

 

 

또한명의 경국지색 팜브파탈 은(상)나라 달기(妲己)의 이야기를 해보자. 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은(상)나라 말엽의 달기의 행적과 너무나 유사하지 않는가 ? 유시씨국(有施氏國) 달기는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여인이니 말이다. 고서에서는 달기(妲己)의 미모를 이렇게 형용하고 있다고 한다.

 

'구름처럼 검게 늘어진 머리카락,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봄산처럼 옅고 가는 눈썹, 가을파도처럼 둥근 눈동자, 풍만한 가슴 갸냘픈 허리, 풍성한 엉덩이 널씬한 다리, 햇빛에 취한 해당화나 비에 젖은 배꽃보다도 아름다워라.'

 

 

 

 

자 이제..또 한명의 경국지색 팜브파탈 은(상)나라 달기(妲己)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 보자. 달기는 상(商)나라 유소(有蘇: 지금의 해남<海南> 온현<溫縣>) 부락 출신으로 후에 악명 높은 주왕 (紂王,~BC1046)의 비가 되었다. 달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녀의 악명은 중국인들의 언어생활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중국 속어로 "달기정(妲己精: da ji jing)"이라 하면, 그것은 "달기같은 년", "여우같은 년(狐狸精)"이란 뜻으로 음흉하고 음탕한 여인을 욕하는 말이 된다.여하간, 역사상 최고의 요녀아지 독녀로 알려진 달기(妲己)는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은(殷)나라(BC1562~BC1046)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紂王)의 마음을 꼭 사로잡았던 모양이다.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수백년 이전에 있었던 하(夏) 걸왕(桀王)과 말희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달기와 주왕이 상(商)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걸왕과 말희는 하(夏)나라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부여 의 동명왕신화와 고구려 주몽신화가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주왕은 달기에게 흠뻑 빠져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했다.주왕은 '달기야 말로 진짜 여자다.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겪어봤지 만 달기에 비하면 목석에 불과하다. 정말 하늘이 내려준 여자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달기는 "궁중 음악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사오니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하고 물었다. 주왕도 사실 궁중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던 터였다. 즉시 음악을 담 당하는 관리에게 명령하여 관능적이고 자유분방한 『미미지악(靡靡之樂)』이라는 음악을 만들게 하였다고 전해진다.또한 달기는 "폐하, 환락의 극치가 어떠한 것인지 한번 끝까지 가보고 싶사옵니다.지 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후회 없는 삶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내 『주해육림(酒海肉林)』의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공사가 완성되자 질펀한 잔치가 벌어졌다."이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절대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남자는 반드시 여자를 업고 과인이 있는 곳까지 와야 한다." 주왕의 명이 떨어지자 잔치에 참석한 천여 명도 넘는 남녀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이 되어,벌거벗은 남자들은 이리 저리 여자를 붙잡으려 뛰었고 역시 모두 벗은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이러한 잔치는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부터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계속하여 무려 12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고 한다.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불렀다.달기는 재물을 모으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녹대(鹿臺)라는 금고를 만들었는데,그 크기는 넓이가 1리나 되었고 높이는 1천 척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실제적으로 달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주왕을 유혹하여 찬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다 죽게 만들어 놓고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자신의 성욕을 자극시 켰다는 점이다. 포락지형(炮烙之刑) 이라는 형벌이 그 중 하나다. 『포락지형(炮烙之刑)』이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 놓은 후 구리 기둥 위를 죄인들로 하여금 맨발로 걸어가게 하는 형벌이다."끝까지 걸어가는 자에게는 죄를 사면해 준다."며 '불 속에 떨어져 죽느냐? 기름 기둥을 무사히 건너느냐?'라는 절박한 갈림길에서 발버둥치는 죄인의 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즐겼다고 한다.한 사람의 죄수가 뜨거움에 팔딱팔딱 뛰면서 재로 변해 갈 때마다 그녀는 성에 굶주린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주왕의 품에 달라붙어 몸부림쳤다.그녀는 일종의 새디즘(Sadism: 이성을 학대함으로서 성적 만족과 쾌감을 얻는 변태증)적 변태 성욕자였던 것이었을까 ?

 

 

 

 

은왕조를 살리기 위해 많은 충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호소했으나 주왕은 그들을 모조리 죽여 젓 담그고 포를 떴으며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고 전해지나 알 수 없는 일이다. 드디어 주나라의 무왕(武 王)이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주왕은 녹대에 들어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한편, 달기는 사로잡혀 오랏줄에 묶인 채 울음을 터뜨리며 형장으로 끌려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배꽃이 봄비를 흠뻑 맞은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처형할 때 망나니들이 그녀의 미색에 혼이 달아나고 팔이 마비되어 칼을 들어올리지 못했다.그래서 형장의 대장이 90살이 된 망나니로 처형하려 했으나 이 늙은 망나니도 달기를 보자 현기증이 나고 눈이 부셔 목표물을 겨냥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의 얼굴을 보자기로 가린 후 처형했다고 한다.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 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나라 군대가 은나라 수도 조가에 진입한 이후에 더 이상 달기를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의 방증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악녀와 요녀의 화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은나라에 폭군 주왕(紂王,~BC1046)이 있다면 주나라엔 유왕(幽王,~BC771)이 있다. 주왕에게는 달기(妲己)라는 희첩이 있었고 유왕에게는 포사(褒似)라는 희첩이 있었다.

 

 

 

 

재위 46년 동안 주나라를 반석에 올린 왕이 바로 선왕(宣王)이다. 그의 뒤를 이어 유왕이 즉위한 지 2년째 되던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자 당시 백양보(伯陽甫)란 자가 "양기가 자리를 잃고 음기 아래 있 으면 반드시 근원이 막히고,그 근원이 막히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면서 주나라의 멸망을 예언했고 그 시기는 10년 이내라고 못 박았다.그러나 폭군의 기질이 다분했던 유왕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 다. 재위 3년 되던 해에 포사라는 희첩이 생기자 그는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포사는 포(褒)나라의 여인.이 여인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계기에 대해 사마천은 매우 신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하 왕조 의 뒤를 이어 은나라가 등장하고 다시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3대 동안 전해 내려온 한 상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소장하고 있으면 나라에 길조가 든다는 용의 침이었다.금기사안은 어떤 경우든 함부 로 열어보아 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왕의 바로 직전 왕인 폭군 여왕이 말년에 이 상자를 열었다. 여는 순간 침이 궁궐의 뜰로 흘렀는데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것에 개의할 여왕이 아니었다. 여왕이 아녀자들을 발가벗겨 큰 소리로 떠들게 하자 침이 문득 검은 자라로 변해 후궁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때마침 후궁에 있던 예닐곱 살가량의 어린 계집이 자라와 마주 쳤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어 아비도 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그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그 후궁은 두려워 아이를 내다 버렸다. 그런데 유왕의 선친인 선왕 때 어린 여자애들이 부르는 동요가 있었다. "산뽕 나무로 만든 활과 기(箕,콩대)로 만든 화살 통이 주나라를 망하게 하리라."마침 이 노래를 들은 선왕이 길에 활과 화살 통을 파는 부부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을 즉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 들 부부는 도망을 치다 우연히 길에서 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 거두어 길렀다. 그녀가 바로 후궁이 버린 아이였다. 이들 부부는 결국 포나라에 몸을 맡기고 숨어살았는데 계집아이를 버리지 않고 길 렀다. 그러고는 계집의 이름을 포나라에서 성장했다고 하여 '포사'라고 불렀다. 어느 날 여자를 좋아한다는 유왕에게 죄값으로 바쳤다.유왕은 포사를 보자마자 반했고 어느새 백복(伯服)이란 아들을 얻 었다. 기쁜 마음에 태자 의구(宜臼)를 폐위하고 왕후마저 폐위시키더니 포사를 왕후로 삼고 백복을 태자 자리에 두고자 하니,주나라 태사 백양(伯陽)이 역사책의 기록을 들어가며 주나라가 망할 것을 탄식했다.절세 미녀였던 포사,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웃을리가 없는 것이 더 맞다. 포사의 가족들은 유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후궁들은 왕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온 갖 아양을 다 떨지만 포사는 아랑곳 않고 날마다 뾰로똥해 있었던 것이다. 종의 딸로 태어나 유왕의 후궁으로 들어와 포사, 그는 일찌기 미모 하나로 사람을 휘어 잡는 법을 체득했다.그녀는 '공주는 하녀처럼, 하 녀는 공주처럼'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왕처럼 높은 신분의 사람은 마치 자신이 종처럼 다루어야 더욱 끌려 오게 되는 법이다.(손무원작, 석산의 손자병법)

 

비단 찟는 소리를 듣고 포사가 웃는 것을 본 유왕은 매일 비단 백 필씩 가져다가 팔힘이 좋은 궁녀로 하여금 찢게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신하의 실수로 봉화에 불이 올랐다. 천자가 있는 주나라에 봉화 가 오르자 주변국들이 군을 이끌고 급하게 달려왔다. 그러나 실수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상했다. 그런데 포사가 병들의 화난 모습을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간드러지게 웃기 시작했다."어머, 폐하 얄 굿기도 하셔라" "그래, 그대가 기뻐하니 아주 좋구나. 그대의 기쁨을 위해 내가 무엇인들 못하리. 천하라도 팔아넘길 것이니라"유왕은 포사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황홀해 짐을 느겼다. 포사의 미 소에 넘어간 유왕은 신하들에게 매달 마다 봉화를 올리도록 어처구니 없는 명을 내린다. 『여산봉화(驪山烽火)』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봉화를 올리는 숫자가 늘어가자 제후들도 점점 출전을 하지 않게 되다가 결국에는 한명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왕후가 쫓겨 났다는 소식을 들은 신후백은 너무나 화가나 견융족을 뜰어들여 주를 공격한다. 깜짝 놀란 유왕이 봉화를 올렸지만 한 명 의 제후도 오지 않았다. 또 요망의 계집의 꾐에 빠져 웃기려고 봉화를 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웃음을 보기 위해 나라를 팔아버린 유왕의 말로는 비참하기 그지 없다. 결국 유왕은 신후 백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간다. 한편 포사도 견융족의 추장에 잡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이 후로 중국은 견융족을 몰아내기 위해 진, 위, 정 나라의 제후들이 군을 이끌고 와서 평왕을 세운다. 평왕 도 여색을 즐기고 포악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주나라는 망하고 춘추시대가 시작된다.

 

 

삼부이군일자(三夫二君一子)를 죽게 만든 경국지색이었던 정나라 하희(夏姬)에 대하여 이제 알아보자. 하희(夏姬)는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 목공의 딸로 여러 고사성어를 낳을 만큼 아름다웠다고 한 다. 하희는 열다섯 때 꿈을 꾸는데, 천신이 나타나 소녀채전술(素女采戰術)혹은 내시법(內視法)이라는 특이한 비법을 알려주어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리하여 하희가 세 번 젋어졌다 는  『삼소(三少)』라는 고3사성어도 나오게 된다.

 

 

 

 

하희(夏姬)는 처음에 자만(子蠻)이라는 대부와 결혼했는데, 자만은 넘치는 색욕의 하희를 감당치 못해 요절한다. 그후 나중에 정영공(鄭靈公)이 되는 이복 오라비 자이(子夷)와 또 다른 왕실 총각 자공( 子公)과 놀아난다. 뒷날 이 문제가 발단이 되어 자공이 정영공을 죽이고 정양공鄭襄公을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공식적으로는 과부였던 하희는 진(陳)나라 대부 하어숙(夏御叔)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래서 이후 "하희夏姬"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기원전 617년 하희는 아들 징서(徵舒,征舒 라고도 함)를 낳는다. 대략 이 무렵 17세쯤 되었던 모양이다다.기원전 605년 남편 하어숙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그러자 대부 공녕(孔寧)이 선물 공세를 펼치며 집적대기 시작. 결국 관계를 갖는데 성공하져. 공녕은 하희의 집에서 속옷 하나를 훔쳐와 입고다니며 자랑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열받 은 대부 의행보儀行父)역시 선물 공세로 관계에 성공한다. 그리고, 공녕이 속옥을 받았다고 자랑한다며 정표를 주기를 청한다.그러자, 하희는 공녕은 훔쳐간 것이라며 적삼을 내어주게 되는데 시기심 에 불탄 공녕은 전혀 엉뚱한 수를 놓는데 진나라 영공(靈公)에게 하희를 소개해 버린 것이다.어이어이 진영공도 속옷을 선물 받아와서는 두 신하를 불러다가힐난하는데, 신하의 답변은 이랬다 한다.“ 맛 좋은 음식이 있으면 임금께 바치기에 앞서 신하가 먼저 맛보고 올리는 게 도리인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셋은 날짜를 정해 서로 안 겹치게 방문키로 한다고 전한다. 진영공의 이 행각은 얼마 나 유명한지, 심지어 시경에 시로도 남아있다.

 

 

胡爲乎株林 從夏南 주림에는 왜 가는가? 하남을 만나러 간다네
匪適株林 從夏南 주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남을 만나러 간다고 하네
駕我乘馬 說于株野 나도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의 들에 묵으리라
乘我乘駒 朝食于株 나도 네 필 망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서 주림에서 아침을 먹으리라.

 

 

그러나 나라에 이런 막장 대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닌 터. 근엄한 대부 설야(泄冶)가 군신 간의 이런 음란한 행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힐난하자, "모든 사람이 내 불선不善을 안다 해도 두렵지 않지만 설야가 그것을 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라며 영공은 자객을 보내 설야를 죽여버린다.

 

 

 

 

세월은 흘러 기원전 599년 하희의 아들 하징서가 18세가 되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세상은 온통 세 남자와 붙어먹는 엄마 욕으로 시끌시끌하다. 더구나 이 세남자(공녕,의행부,진영공) 모이면 하징서가 너를 닮았네, 해가며 놀고 있다.하징서는 진영공을 초대한 뒤에 활잡이들을마굿간에 숨겨두었다가 쏴죽인다.대부 공녕과 의행보는 초나라로 달아난다. 거기서 초나라 대부 굴무(屈巫 )를 만난다. 굴무에게 얼마나 하희 자랑질을 했는지 굴무는 필생의 소원으로 하희와 결혼할 것을 다짐하게 되고.굴무는 초나라 장왕(莊王)을 이용해서 진나라를 치게 한다. 기원전 597년 하징서는 장 왕에게 잡혀서 오거분시(다섯수레에 팔다리 묶여 찢어죽이는 형벌)를 당해서 죽게된다. 그리고 초장왕은 하희를 차지해 버린다. 굴무는 닭쫓던 개 신세가 되었는데 굴무는 장왕에게 협박을 한다. 정신 이 번쩍 든 장왕은 하희를 내놓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끼어드는 장군 자반도 있었다고.그러나 장왕은 하희를노신양로(襄老)에게 척 앵겨주고 만다. 못 먹는 밥 재나 뿌리는 심사이다. 하지만 늙어빠 진 양로는 전쟁에 나갔다가 사망. 시체도 찾지못한다. 그러자 병사들이 아들 흑요(黑要)를 찾아갔는데, 흑요는 나와보지도 않는다. 하희와 즐기느라 바빴으니 말이다.굴무는 술수를 부려 하희를 고국인 정나라로 돌려보낸다. 아버지 정목공은 죽었고 동생 정양공(襄公)이 다스리고 있는 중이었다.그리고 굴무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척 하다가 정나라로 가서 하희에게 청혼, 드디어 결혼에 성공한다 기록에 따르면 굴무의 딸도 천하절색이었다고 하니 하희의 소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천하절색을 가리키는 말 중 요물딱지라는 뉘앙스를 주는 말로 우물(尤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굴무의 딸 을 가리키는 말로, 우물이 덕과 의를 갖추지 못하면 반드시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는 말이다. 진나라 대부가 굴무의 딸을 아내로 맞이러 하자, "그 여자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나온 말이다.그런데 굴무 가 하희와 결혼했다고 하자 열받은 인간이 하나 있었으니바로 자반 장군이다. 자반은 초에 남아있는 굴무의 식솔을 싸그리 제거해버린다. 이때 흑요도 같이 목이 달아났다. 굴무는 분노에 차서 자반에 게 편지를 보낸다.굴무는 벌써 초나라에서 가까운 정나라에서는 달아나 진(晉)나라[하희가 원래 살던 진(陳)나라가 아님] 경공 밑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진과 초는 대대로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였으 니까요. 굴무는 경공에게 오나라를 충동질해서 초와 싸우게 하겠다고 말한다.아예 아들 호용(狐庸)을 오나라에보내고 오나라 통치자 수몽(壽夢)에게 가서 전차부대 조종술, 궁병대 사용법과 진법 등등 을 죄 가르친다. 힘을 얻은 오나라는 초나라 똘마니들을 죄 격파하고 다닌다. 1년 동안 일곱 군데를 격파하는데 자반 장군은이 파상 공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 사이에 경공이 하희를 차지해버 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초나라가 허둥대자 진나라가 떨쳐 일어나 황하를 건너 쳐들어간다. 그런데 초나라도 공왕이 직접 출동. 이 전쟁에서 공왕은 한쪽 눈을 잃고 애꾸가 되는데, 이것을 언릉전투 라고 부른다.

 

 

 

 

애꾸가 된 공왕, 열받아서 전쟁에 진 자반 장군을 호출 자반은 자살하게 만든다.열녀전에 따르면 하희는 세번 왕후가 되고, 일곱 차례 제후의 처가 되었고 삼부이군일자(三夫二君一子)를 죽게했다고 한다. 자만, 하어숙, 굴무의 세 남편과, 정영공과 진영공 두 임금과, 아들 하징서를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4대 미인과 4대 요녀는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일화들이다. 잠시 탐방하는 사이에 여인들의 모습이 영상처럼 스친다.다음에는 다른 여인들을 만날 것을기약한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고 했던가..소식(蘇軾)의 시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雙頰凝 髮抹漆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네
眼光入廉珠的白樂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나는 구나
故將白練作仙衣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不許紅膏汗天質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吳音嬌軟帶兒癡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無限間愁總未知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自古佳人多命薄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閉門春盡楊花落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사연은 남는 법인가. 오늘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 ?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면 한 줄기 석양에도 가슴이 허해지는 법이다. 살아있는 경국지색의 미모가 세월에 퇴색되는 기분도 묘하다. 한잔의 술에 경국지색의 여인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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