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7강.성,사랑,페미니즘에 관한 철학적 사색

샐각의창|2014. 5. 29. 12:15

프로이드는 사람의 두 가지 원초적 충동을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노스로 분류했다. 에로스는 삶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충동이기 때문에 사랑과 섹.스.로 표현된다. 타나토노스는 죽고 싶어하는 충동이기 때문에 자살, 폭력, 살인등의 형태로 표현된다. 흔히들 사랑은 정신적 사랑 뿐만 아니라 육체적 사랑까지 합하여 완성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들 한다. 20세기 이전에는 섹.스.는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마저 금기시 되어왔다. 20세기 들어서고도 중반이 넘어서야 토론의 대상이 될만큼 섹.스.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여전히 조심스럽고도 뜨거운 단어임에 틀림없다. 결혼의 틀 속에서만 섹.스.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서 진일보하여 '사랑한다면 섹.스.는 당연한 것이다' 까지의 사고의 틀은 유연해져 왔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성매매등을 통한 사랑없는 섹.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 바티이유는 사랑없는 섹.스.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람은 금기를 위반하더라도 일정한 규칙하에서 위반하기 때문에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는 바타이유는 금기를 위반하는 섹.스.가 사람의 사물화를 막아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금기를 어기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고, 그런 이유때문에 금기를 없애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이야기 한다. 죽음과 에로티즘 , 고통과 기쁨이 바로 금기의 소재이며 그것은 에로티즘이 곧 죽음과 같고 고통은 곧 기쁨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사디즘이나 마조히즘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디즘 마조히즘은 금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경지지만 바타이유는 이 기쁨과 고통의 금기를 설정하고 놀이를 하는데서 희열을 느낄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성이냐 욕망이냐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바타이유의 일명 방탕이론을 많이 대비시키곤 한다. 하버마스는 오늘날까지 철학적 탐구의 근본주제는 이성과 합리성 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은 항상 그 출발에서부터 전체로서의 세계, 현상의 다양성 안에 있는 통일성을 이성 속에서 발견된 원칙들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최근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구조주의 태동은 이러한 전통적인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고 현대 철학의 흐름으로 볼 때 극단적인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이들만으로는 보편타당한 객관적 진리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버마스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합리성 개념을 행위이론과 연관해서 규정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말하는 합리성은 인식의 소유와 관계하기보다, 언어로 말할 수 있고 행위 할 수 있는 주체가 지식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관계를 맺고 있다. 종래의 합리성은 보편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다고 전제되는 투명한 인식 기능으로 이성의 빛과 일치하는 것, 즉 이성의 빛에 따른 믿음이나 행동을 의미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이성의 문제는 행위합리성과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행위합리성은 다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접근될 수 있으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은 형식 화용론적 토대 위에서 언어적 상호이해를 실마리로 하여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근대 계몽이성의 프로젝트를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바꾸어낸 것은 바오밥 나무의 존재를 사실상 기반하고 있다. 바오밥 나무와 같이 필요욕구로 가득 차, 유한한 자원 속에서 남들의 이해를 침해하지 않고 인민전쟁으로 치달아가지 않도록 이성은 그것을 소통시켜내고 합의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적 합의모델은 바오밥 나무의 생존적인 본능에 기반 한 욕구모델을 사실 상 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러한바오밥 나무 유형에 기반 한 의사소통적 이성은 바오밥 나무가 상호주관성이라기보다는 실지로는 독점적인 이해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이 독점적 이해에 움직이려는 바오밥 나무의 뿌리를 근절해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은 내적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이상적인 담화요건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바오밥 나무는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유형의 나무가 있다. 그것은 물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뿌리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된 수상 식물형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상 식물형 나무는 물 위에서 동동 떠다니며, 땅에 뿌리를 박기 않으며, 서로의 뿌리를 지지대로 삼아 군락을 이룬다. 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던 상황에서 이 나무의 생존방식은 놀랍게도 바타이유의 잉여의 문제에 매우 유사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나무의 주된 특징은 떠돌아다니며 무리를 이룬다는 특징은 노마드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주민들의 특징은 잉여를 찾아서 떠돈다는 것이며, 떠돌이, 이방인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탈근대의 인간유형을 의미한다.바타이유의 수상식물형 나무의 유형은 너무 남아돌아가지만, 그것에 대한 수평적인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상황에서 그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초국적 자본이나 이주노동자들의 실존적 양상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뿌리를 지지대로 삼지 않고, 보트처럼 잘 떠돌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부재와 결핍의 상황에서의 뿌리의 의미와 잉여와 과잉에서의 뿌리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탈근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며, 바타이유의 과잉과 잉여의 차원은 이러한 형상 속에서 탈근대의 상황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바타이유의 일명 방탕이론은 홉스의 철학처럼 유한한 자원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잉여가 문제가 된다. 바타이유는 잉여를 파괴적으로 다루는 카니발리즘이라는 제의를 분석하면서, 기존 경제학이 다루고 있는 유한한 자원과 이를 둘러싼 결핍의 욕구로 가득 찬 경쟁적 인민이라는 공식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타이유의 잉여에 대한 방탕이론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황을 예감하고 있다. 그것은 재화의 과소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재화와 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문제인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은 근대초기의 계산 이성적 설정이나 고전 경제학의 상황과 매우 다른 상황을 의미한다. 이제 전쟁은 유한한 자원을 둘러싼 투쟁을 의미하기 보다는 과잉되어 있는 자원에 대한 파괴의식으로 바뀐다. 방탕한 자본주의의 욕망은 부르주아계급에 한정되기 보다는 노동귀족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욕구의 수준에 한정되어 있던 노동자들도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 잉여와 접속하게 되며, 거대한 귀족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잉여의 방탕적 소비와 관련된 문제가 사회적 차원의 새로운 지반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이제 잉여에 대한 방탕적 소비는 스놉들의 과시소비와 같은 명품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노동귀족들의 교육 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타이유는 탈근대 상황이 부와 재화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에 대한 인식은 이성이냐 욕망이냐하는 문제에도 적용된다.이성도 일종의 욕망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과소적 상황에서 서로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그것의 합리적인 분배를 위한 계산의 요청이나, 그것의 의사소통적인 합의로의 도출을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었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욕망은 충돌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일면적 차원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이성은 재화나 부가 과소한 상황에서 바오밥나무 유형으로만 디자인 된 결과 매우 협소한 역할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의 내적 자기 원인이 이러한 욕망의 지형에만 한정될 때, 의사소통적 이성의 풍부한 논의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소통이성에 대한 이론은 과소이미지에 협착되어서 논의될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잉여와 과잉의 문제를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에 기반 한 이성의 논의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으며, 형식적 요건으로 존재하는 타당성 요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에 대한 논의로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버마스가 바오밥 나무유형의 욕망 기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수직적 의사소통의 유형에 자신을 가두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오히려 잉여의 차원에서 도출되는 수상식물형 나무 유형의 수평적 연결접속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론에 도입하는 것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또한 바타이유의 방탕이론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차원의 욕망은 새로운 합리성에 대한 지식을 증대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욕망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직관이 무엇이었는지 탈근대 상황에서 많은 부분 해명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정확히 인식의 차원에서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의 변화는 평행적으로 이성적 차원의 변화도 수반한다. 이성의 영역을 단순히 과소이미지에 갖힌 계산이성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욕망과 평행적으로 움직이는 이성의 담화가능성의 계기를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에 대한 논의에는 일종의 이론적 공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적 공백을 욕망이론으로 탈출하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새로운 지형을 조명함으로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이론은 이성의 이론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지만, 욕망은 가장 이성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삶의 기반이기 때문에, 이성은 욕망의 변동에 조응하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탈근대-근대의 논의에 있어서도 이성에 대한 논의는 탈근대를 수용하지 못하면서, 결국 욕망의 새로운 지형에 대해서 접근하지 못하고, 현실과 멀어지는 효과를 갖게 되었다고 할 때, 이성에 대한 논의는 계산이성과 같은 과소이미지에 협착된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으며,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등이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 분석하고 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섹.스.에 관한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바타이유의 일명 방탕이론을 접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기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섹.스.에 대한 감정은 바타이유의 방탕이론을 은근히 지지하고 있지 않을까 ?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이 방탕이론을 따라가고 있다면 그의 이론이 설득력이 있는 이론임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만 충실하여 세상을 살아간다면 사회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을 것이다.섹.스.후 감정이 정화되는 것 처럼 사고는 항상 정연한 이성의 틀 위에 서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본다.  ‘사랑없는 섹.스.’는 섹.스.에 감정을 섞는 것을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감정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려 한다.사랑없는 섹.스.는 나에 대한 남의 감정, 남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시하더라도 내 몸에 대한 나의 감정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하게 된다. 자기 몸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경우에 하는 섹.스.라는 것이 특징이다. ‘사랑없는 섹.스.’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사랑없는 섹.스.는 몸을 가장 아름다운 기호로 소비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사물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소비사회에서 사랑없는 섹.스.는 나든 남이든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죽은 사물 즉 기호로서 취급하는 현상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헤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며 함께 철학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육체관계를 배제하지는 않으며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스스로를 바꾸어가며 조율하는 사랑이다.

어린왕자를 기억하는가? 어린왕자》에 나오는 참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방향을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로의 모습을 바꾸고 조율하는 과정 즉 길들이기가 요구된다. 플라토닉 러브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혜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꾸준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어린왕자》의 참사랑을 얻기 위한 길들이기는 플라토닉 러브에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플라토닉 러브는 몸 보다 마음이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러다보면 섹.스.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요즈음 젊은이들은 단어 자체마저 좋아하지 않는다. 플라토닉 러브가 섹.스.를 억압하는 금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젠더(gender)’의 의미는 무엇인가 ? 사회가 만든 성으로서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른 내용을 갖는 성.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사회문화적으로 부여되는 성을 젠더라고 한다. 주로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타당하지 않음을 주장하고자 할 때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 사회가 여성젠더를 가지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해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실제로 사회마다, 시대마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내용이 다르다. '남성다움'이란 단어도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일을 잘 할 수 있게끔 근육의 완력이 센 사람이 남성답다는 평가를 받았고, 산업사회에서는 근육의 힘을 가진 사람 보다는 상품을 생산하여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남성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성다움'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이전의 사회에서는 '현모양처'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았다. 하지만, 지금의 '여성다움'은 섹슈얼리티함을 포함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이룩하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 원칙은 무엇일까 ? 하나는 성의 차이를 해소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다. 성의 차이를 해소해서 남성이 하는 것을 여성도 똑같이 함으로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길이 있고, 남성과 다른 여성의 특성을 잘 살려서 여성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 여성의 장점을 발휘해서 여성에 대한 대우를 좋아지게 하려는 길이 있다. 사람의 섹.스.는 나와 남의 관계를 만드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사랑은 ‘두 감정 사이의 배타적인 인정을 약속하는 것’이고 인정하는 것이므로 사랑은 인정과 무시를 가져오고 인정과 무시는 사회관계와 관련이 있다. 섹.스.와 사랑이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섹.스.와 사랑을 통해 인정과 무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정과 무시를 통해 나는 나를 형성하게 되고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을 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자아정체를 형성한다. 성차별은 여성에 대한 무시가 사회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다. 성차별을 극복할려면 제도적인 장치도 중요하지만 의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의식의 전환없는 제도적 장치는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인 여성을 인정해줌으로써 여성으로부터 억지로 하는 인정이 아닌 진정한 인정을 얻을 수 있다.섹.스.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페미니즘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쯤 여기는 남성은 여성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양파껍질 같다는 여성의 마음구조를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와의 계약결혼으로 새로운 형태의 남녀관계를 보여주기도 했던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제2의 성』에서 말했듯이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참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존 그레이) / 철학-섹슈얼리티에 말을 건네다 (김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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